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마스쿠스 (문단 편집) ===== 파티마 왕조 ===== [[파일:다마스쿠스신부미나렛.jpg|width=360]][[파일:다마스쿠스 동전.jpg|width=540]] 10세기 후반 대사원 북쪽에 세워진 신부의 미나레트와 파티마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의 디나르 금화 카르마트가 떠난 후에도 디마슈크는 파티마 조의 베르베르 군대를 거부하였다. 알프타킨의 부관 카셈이 여론과 민병대의 지지를 받아 집권하였다. 이에 파티마 장군 알 파들 이븐 살리흐가 진군하였지만 무력시위에만 그치고 회군하였다. 979년 (혹은 980년)에는 술레이만 이븐 자파르[* 970년 디마슈크를 점령했던 자파르 이븐 팔라의 아들]가 재차 원정을 시도했지만 실패하였다. 한편 알 파들의 자라흐 부족 지원은 해당 베두인들의 세력 확대로 이어졌고, 그들은 본거지인 라믈라를 벗어나 시리아 남부 일대를 지속적으로 약탈하였다. 디마슈크의 교외 곡창 지대인 구타 오아시스와 하우란이 황폐화되었고, 도시는 기근에 시달려야 했다. 때때로 함단 왕조령 홈스[* 당시 함단 왕조에 복속한 튀르크 장군 바크주르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에서 오는 식량만이 상황을 일시적으로 호전시킬 뿐이었다. 981년, 파티마 조는 이번엔 베르베르계가 아닌 알프타킨의 전 장교이던 발타킨을 사령관으로 삼아 디마슈크를 봉쇄하였다. 한편 파티마 조의 견제에 불만을 품은 자라흐 부족이 봉기하여 포위군을 공격했다가 토벌되었다.[* 이후 부족장 무파리즈는 홈스를 거쳐 동로마령 안티오크로 도주, 동로마 편에서 바크주르의 알레포 공격에 맞섬, 다만 984년 칼리파 알 아지즈의 사면으로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와 디마슈크 총독 바크주르의 동맹이 되었다. 비록 988년 바크주르와 토벌군 간의 전투에서 패한 후 전자와 라카로 떠났는데 991년 파티마 조의 재상 야쿱이 사망하자 (그의 유언과 달리) 알 아지즈로부터 재차 사면을 받아 귀환하였다. 그리고 만주타킨과 베르베르 군단의 대결 시에 자라흐 부족은 전자에 붙었다가 전황이 불리해지자 후자로 전향, 만주타킨을 추격해 사로잡기까지 하며 세력을 유지하였다] 포위를 견디던 카셈은 983년 초엽 관직을 대가로 항복하였다. 마침내 12년 만에 디마슈크는 파티마 제국령이 되었다. 같은해 여름 홈스의 아미르 바크주르가 함단 왕조에서 파티마 조로 전향한 후 그 군대를 이끌고 할랍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함단 왕조의 요청으로 남하한 동로마 군이 그를 격파하고 역으로 홈스까지 점령하였다. 칼리파 알 아지즈는 현지 여론과 재상 야쿱의 반대에도 바크주르의 요청을 수용, 영지를 잃은 그를 디마슈크 총독으로 봉하였다. (983년 12월) 얼마 후인 985년 도시를 방문한 팔레스타인 출신 여행가 알 무카디시는 도시의 위대함과 동시에 옛 영광이 바랜 모습을 모두 묘사하였다. 바크주르는 공포 정치를 하였고, 987년 야쿱의 사주로 일어난 봉기를 진압한 후 반대파를 학살하였다. 결국 988년 봄, 야쿱에게 설득된 알 아지즈는 바크주르의 해임을 선언하곤 무니스 휘하의 토벌군을 파견하였다. 바크주르는 두 달간 게릴라로 싸웠지만 도시 동남쪽 다리야에서 패배하였다. 좌절한 바크주르는 사면과 거취의 자유를 보장받은 후 라카로 떠났다. (988년 10월 29일)[* 그곳에서 바크주르는 재차 전 주인인 함단 왕조의 사드 앗 다울라의 알레포를 빼앗기 위해 싸웠다. 이에 사드 앗 다울라는 재차 동로마의 지원을 받아 991년 4월 알레포 동쪽 나우라에서 바크주르를 격파하였고, 사로잡힌 그를 처형하였다] 그후 야쿱의 굴람 (맘루크) 앗 시클라비가 총독으로 부임였다. 991년 야쿱이 사망한 후에는 튀르크 장군 만주타킨이 부임하였고, 그가 두 차례 알레포를 포위할 시에 디마슈크는 후방 보급 기지였다. 마침내 996년, 알 아지즈는 알레포로 친정을 나서려 했으나 출정 직전 급사하였다. 한편 군부가 마샤리카 (튀르크) 쪽으로 기우는 것에 반발한 마그리비야 (베르베르) 군단이 어린 칼리파 [[알 하킴]]을 끼고 조정을 장악하려 하였다. 이에 만주타킨은 이집트로 남하하였고, 마그리비야 역시 술레이만 이븐 자파르의 지휘 하에 북상하였다. 양측은 전례대로 라믈라 부근에서 맞섰는데, 만주타킨은 패하고 사로잡혔다.[* 다만 튀르크 군부와도 화해하려 했던 재상 하산 이븐 암마르는 그를 단순히 은퇴시켰고, 1007년 카이로에서 자연사하였다] 술레이만은 디마슈크로 향하여 스스로 총독이 되었고, 주민들은 또다시 베르베르 병사들의 출몰에 반발하였다. 또한 대다수가 순니이던 주민들의 쉬아 지배에 대한 거부감은 불만을 증폭시켰다. 이러한 불온적인 기류에 대해 파티마 조정은 잔혹히 대응하였다. 998년 수백명에 달하는 디마슈크의 반파티마 계열 지도자들이 총독 관저의 하맘 (목욕탕)에 초청되었다. 그들은 당국을 신뢰하지 않았지만 응하지 않으면 처벌이 있을까 두려워 그곳으로 향하였는데, 그들은 대기하고 있던 베르베르 주둔군에 의해 학살당하였다. 한편 파티마 조의 사면과 반란을 지속하던 자라흐 부족은 11세기 초엽 그 세력이 절정에 달하였다. 이미 그들은 997년 라믈라를 공격하다가 디마슈크 총독 자이쉬 이븐 삼사마에게 격파되기도 하였다. 그러던 1011년, 숙청당한 재상의 아들 아불 카심 후세인의 선동으로 자라흐 부족은 재차 봉기하였다. 이에 알 하킴은 튀르크 장군 야루크를 디마슈크 총독으로 봉하여 파견했지만 그는 자라흐 부족의 기습으로 가자에서 붙잡혀 처형되었다. 1012년 7월 반군은 메카 샤리프 하산을 칼리파로 옹립하는 등 기세를 올렸지만, 알 하킴의 뇌물과 1013년의 토벌로 진압되었다.[* 야루크의 진군을 접한 자라흐 부족장 무파리즈의 두아들 마흐무드와 알리가 이집트를 탈출해 부친에게 이를 알렸다. 후세인은 무파리즈에게 야루크가 라믈라에 당도하기 전에 공격하도록 설득하였고, 그들은 가자에 매복하였다. 이를 접한 야루크는 라믈라에서 1천의 기병을 징발해 매복대를 후면에서 기습하게 하였는데, 그 전령이 자라흐 부족에게 잡혔다. 따라서 작전은 실패하였고 야루크는 그대로 라피아에서 붙잡혔고 라믈라가 점령되었다. 이에 알 하킴은 야루크 석방 및 5만 디나르 지급의 회유책을 내놓았는데, 무파리즈가 넘어갈 것을 우려한 후세인은 그의 아들 하산을 설득해 야루크를 처형해버렸다. 후세인은 직접 메카로 향하여 아불 푸투흐 알 하산을 설득해 알 라시드 빌라로 선포하고 라믈라로 데려왔다. 다만 그가 가져온 재물이 떨어지자 자라흐 부족의 지지가 흐지부지 되었고, 이에 낙심한 알 하산은 메카로 돌아가 파티마 조에 재차 충성하였다. 이후 알 하킴의 뇌물을 받은 무파리즈의 아들 하산이 포로를 석방하는 등 유화적인 모습을 보이자 후세인은 이라크를 거쳐 자지라로 도피하였다. 그리고 1013년 여름 알리 이븐 자파르가 2만 4천의 대군을 이끌고 라믈라를 수복하였다. 무파리즈는 독살되었고, 하산은 항복하고 부친의 영지를 이어받았다.] 알 하킴은 1021년 실종사하였고 파티마 조의 쇠퇴가 시작되었다. 1024년 시리아 남부와 팔레스타인의 베두인들은 자라흐 부족을 중심으로 파티마 조에 대반란을 일으켰고, 1028년 이를 진압한 튀르크 장군 아누슈테킨은 시리아 총독으로 봉해졌다. 아누슈테킨은 약 15년간 디마슈크를 다스리며 주민들의 호감을 얻었고 1038년에는 [[미르다스 왕조]]령 알레포를 점령하며 일시적으로 시리아를 통일하였다. 그러나 그의 세력 확대를 경계한 파티마 조의 재상 알리의 사주로 1041년 디마슈크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아누슈테킨은 축출되었고, 이듬해 그는 알레포에서 병사하였다. 그의 후임으로 부임한 함단 왕족 출신의 나스르 앗 다울라[* 그는 후에 1058년부터 2년간 재차 디마슈크 총독을 맡았고, 1060년대 이집트의 내전 시에 카이로를 장악하기도 하였다.]는 1048년 알레포 원정에 실패한 후 흑인 환관 출신 리파크로 교체되었다. 다만 그 역시 이듬해 알레포 원정에 실패하고 사망하였다. 아누슈테킨의 사후 디마슈크는 한동안 역사 기록에서 자취를 감추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