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마스쿠스 (문단 편집) ===== 디마슈크 셀주크 ===== 이후 두카크와 리드완은 시리아의 패권을 두고 내전을 벌였다. 시리아의 영주들은 둘 사이에서 동맹과 배신을 반복하였다. 그러던 서유럽에서는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한편 1097년 초엽, 리드완이 자신을 배신한 야기 시얀의 안티오크를 공격하자 두카크는 후자의 구원에 나섰다. 그러자 리드완은 역으로 디마슈크를 포위했으나 실패하였고, 두카크의 북진에 야기 시얀과 리드완이 재차 연합하는 등 시리아의 혼란은 극에 달하였다. 그해 10월 [[1차 십자군]]이 시리아에 진입하여 안티오크를 포위한 후에야 일시적으로 내전이 멈추었다. 두달 후 두카크는 재차 안티오크 구원에 나섰으나 보에몽에게 격퇴된 후 하마로 철수하였다.[* 야기 시얀의 아들 샴스 앗 다울라의 요청대로 두카크는 안티오크 동쪽 하림에서 식량을 징발하던 타란토 백작 보에몽과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의 십자군 분견대와 마주쳤다. 하지만 두카크가 망설이는 동안 십자군은 전투 대형을 갖추었고 이어진 전투에서 다마스쿠스 군대는 패하였다. 두카크는 샴스의 필사적인 설득에도 불구하고 하마로 철수하였다. 그나마 전투 중 십자군의 식량이 소실되어 안티오크 포위전 내내 그들이 식량 부족으로 고통받게 된 것이 야기 시얀의 유일한 소득이었다.] 이듬해 모술의 카르부카의 구원 시에도 두카크는 합세하였다가 승리 시에 그의 영향력이 커질 것을 우려하여 전투 직전 이탈하였고 오히려 그의 영토인 디야르바크르를 점령해버렸다. 따라서 구원은 실패하였고 1098년 6월 안티오크는 함락되었다. 학살로 점철된 안티오크의 비극과 달리 디마슈크는 이 시기에 중요성을 회복하였다. 두카크는1097년 도시의 첫 비마리스탄 (종합병원), 1098년 사르디예 마드라사를 세웠다. 한편 1099년 7월,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유혈 점령하자 피난민들은 디마슈크로 몰려들었다. 이에 카디 알 하라위는 그들을 이끌고 바그다드로 향하여 칼리파 궁전에서 지하드를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으나 무위에 그쳤다. 여론을 의식한 두카크는 이듬해부터 '지하드'에 나섰다. 1100년 초엽, 그는 예루살렘에서 성탄절을 보내고 각자의 영지로 돌아가던 안티오크 공 보에몽과 에데사 백작 보두앵의 일행을 바알벡 부근에서 기습했으나 격퇴되었다. 다만 그해 5월, 골란 고원을 약탈하고 귀환하던 십자군에 대한 습격은 성공적이었다. 십자군은 많은 약탈물 때문에 제대로 반격도 못하였고, 전사자들을 수습하지도 못하고 패주하였다. 이는 시리아의 영주가 십자군에 대해 처음으로 거둔 제대로된 승리였다. 다만 그 다음달 반격에 나선 십자군 영주 탕크레드가 디마슈크 일대를 약탈하였고, 이에 두카느는 재물을 주어 무마시키려 하였다. 그러자 탕크레드는 사절을 보내 기독교로 개종하거나 도시를 바치라는 모욕적인 답변을 주었는데, 분노한 두카크는 역으로 사절들에게 개종 혹은 죽음의 선택을 강권하였다.[* 그 결과 1명은 개종을 수용하였고 거부한 나머지 5명은 처형되었다] 이로써 협상이 결렬되자 약탈은 10여일간 이어져 도시 일대의 농경지는 황폐화되었고, 골란 고원의 영주들은 예루살렘 왕국에 조공하기 시작하였다. 그해 10월, 예루살렘 국왕 고드프루아가 사망한 후 그 조카인 에데사의 보두앵이 계승을 위해 소수의 병력과 예루살렘으로 남하하였다. 복수를 노리던 두카크는 레바논의 '개의 협곡'에 매복하여 그를 노렸으나 두카크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한 인근 트리폴리의 파크르 알 물크가 보두앵에게 이를 누설하였다. 십자군이 진군을 멈추자 당황한 디마슈크 군은 다음날 화살을 날리며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반격을 당해 패퇴하였다. 이로써 작전은 실패하였고, 무사히 즉위한 보두앵 1세는 첫 군사 활동으로 요단강을 넘어 디마슈크령 요르단을 약탈하였다. 두카크는 보두앵에게 5만 베잔트를 납부하고 이전 전투의 포로 석방을 제안한 것 외에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한편 십자군의 위협이 가중되자 1101년 봄, 시리아의 해안도시 자블라의 카디가 디마슈크에 복속하였다. 이에 두카크는 부관 툭테긴의 아들 부리를 태수로 파견했지만 주민들의 반발을 사 축출되었고 도시는 트리폴리령이 되었다.[* 애초에 트리폴리에 대해 반기를 들었던 것. 도시를 수복한 파크르 알 물크는 부리를 사과 편지와 함께 되돌려보냈다] 이듬해 레몽의 십자군이 트리폴리를 포위하자 파크르 알 물크는 염치 불구하고 도움을 청해왔다. 1102년 4월 두카크는 홈스의 병력과 함께 그와 합류했는데, 막상 전투가 시작되자 둘은 이탈해버렸고 당황한 파크르 알 물크는 벙력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대패하였다. 결국 양측의 연이은 배신은 예루살렘 왕국의 정착과 트리폴리 백국의 성립이란 결과로 이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