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마스쿠스 (문단 편집) ===== 부리 왕조 ===== 1103년 5월, 십자군과의 투쟁에 앞장서던 홈스의 자나 앗 다울라가 아사신에게 암살당하자 두카크는 부관 툭테긴을 파견해 도시를 접수하였다. 이로써 그는 시리아에서 가장 큰 세력을 지닌 아미르가 되었다. 그러나 두카크는 얼마못가 1104년 몸져누웠고, 모친의 조언에 따라 자신의 아타베그였던 툭테긴을 자신의 어린 아들 투투쉬 2세의 아타베그로 지목하곤 그해 6월 사망하였다. 툭테긴은 두카크의 과부와 결혼하여 정당성을 확보한 후 전권을 장악하였다. 이에 투투쉬가 반발하자 툭테긴은 그를 폐위시키고 동생인 11세의 이르타쉬를 옹립했는데, 그마저도 축출하고 스스로 아미르로 등극하였다. (1105년 4월) 12살의 이르타쉬는 남쪽 [[보스라]]의 영주 알 아이테킨에게 의탁하여 복위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보두앵의 궁정으로 망명하였다. 툭테긴은 정당성 강화를 위해 지하드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요르단을 약탈한 후 귀환하던 갈릴리 공 위그를 기습해 전사시키는 전공을 세웠다.[* 정확히는 중상을 입은 후 사망한 것]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도시의 이론가 알리 이븐 타히르 앗 살라미가 '키타브 알 지하드'를 저술하여 십자군에 대한 무슬림 지식인의 입장을 드러내었다.[* 그에 의하면 1085년 톨레도 함락부터 십자군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또한 선지자 무함마드의 말대로 알 쿠드스 (예루살렘)는 단지 일시적으로 잃은 것일 뿐이고 콘스탄티노폴리스도 정복될 것이라 하였다.] 같은해 8월 파티마 군대가 북상하자 툭테긴은 부관 사바와에게 1천여 군대를 주어 합류시켰다. 다만 연합군은 8월에 벌어진 3차 라말라 전투에서 보두앵에게 격파되었다. 1105년 10월에는 디마슈크 군이 갈릴리의 토론 성채를 공격했으나 보두앵이 재차 격퇴하였고, 툭테긴은 그와 휴전을 체결하였다.[* 이때 디마슈크 사절단은 보두앵이 환대해주자 감탄하였다고 한다] 얼마간 휴전이 이어지던 중 1108년 5월 툭테긴은 또다시 요르단을 약탈한 후 귀환하던 갈릴리 공 제르바제를 생포하였고, 보에몽에게 무리한 석방 조건[* 티베리아스, 하이파, 아크레를 할양하라는 것]을 걸었다가 거절되자 몸값 제의도 거절하고 그를 처형하였다. 8월엔 보두앵이 시돈을 포위하자 툭테긴은 도시로부터 3만 베잔트를 받고 튀르크 기병을 파견해주었고, 포위는 풀렸다.[* 싸움 없이 존재 만으로 보두앵이 퇴각. 그후 시돈은 도시 점령하지 않는 대가로 9천 베잔트 추가 지급함] 그리고 툭테긴은 은퇴를 결심한 파크르 앗 딘의 호의로 아르카 영주의 복속을 받을 수 있었다.[* 포위가 지속되던 트리폴리의 태수 파크르 알 물크는 직접 바그다드로 향하여 술탄의 원군을 얻어내려 했으나 의례적인 답변만을 얻었다. 소득 없이 귀환한 그는 포위된 트리폴리로 가지 못하고 디마슈크에 머물렀는데, 도시가 파티마 조에 복속했다는 소식에 자블라로 은퇴하였다. 그리고 머무는 동안 호의를 베풀어 준 툭테긴에게 보답으로 아르카 영주의 복속을 주선해 주었음. 다만 1109년 탕크레드가 자블라를 함락하자 파크르 앗 딘은 재차 디마슈크로 돌아옴] 1108년 12월, 툭테긴은 요르단의 세금 1/3을 바친다는 조건으로 보두앵과 휴전을 맺었다. 다만 이듬해 트리폴리 백작 기욤이 부카이아 고개를 지나던 툭테긴을 매복해 격파하고 아르카를 점령하였다. 1110년 4월, 툭테긴은 바알벡의 영주 귀무슈테킨이 십자군에 항복하려 하자 도시를 병합하고 아들 부리를 태수로 봉하였다. 다만 9월엔 보두앵의 협박에 디마슈크의 양곡 1/3을 바쳤다. 그해 12월 포위 끝에 시돈이 십자군에 항복하자 툭테긴은 포로가 된 주민들의 몸값을 대주었고, 일부는 디마슈크에 정착하였다. 1111년 툭테긴은 술탄이 십자군에 맞서도록 파견한 마우두드와 합류했으나 큰 성과는 없었다. 그해 말엽 십자군이 티레를 포위하자 툭테긴은 도시의 요청대로 5백의 궁수를 용병으로 보내주었고[* 유력자들의 재산 보관을 약속하였는데, 이를 위한 운송 행렬은 보두앵에게 약탈당하였다. 본래 레이날드라는 십자군 기사를 매수하여 십자군 영토 안전히 통과할 계획이었는데 그가 보두앵에게 폭로해버림] 티레에 집중하기 위해 알레포의 리드완과도 동맹하였다. 포위가 시작되고 티레가 복속, 원군을 청하자 툭테긴은 출정하였고 십자군 진영을 포위하여 수비대의 승리를 도왔다. (1112년 4월) 1113년 봄, 보두앵이 진군해오자 툭테긴은 마우두드와 연합하여 6월 티베리아스를 포위하였고 구원에 나선 보두앵을 앗 산나브라 전투에서 격파하였다.[* 다만 티베리아스 포위는 트리폴리-안티오크의 개입으로 풀렸다.] 그후 마우두드는 9월 툭테긴의 초청으로 디마슈크에 주둔하였다. 그리고 10월 2일, 재차 출정하기 전날 대사원에서 기도를 마친 마우두드는 툭테긴과 걷던 중 군중 속에서 나타난 자객에게 찔려 중상을 입었다. 이로써 원정은 취소되었고, 마우두드는 이듬해 3월 사망하였다. 툭테긴은 아사신을 탓했지만, 여론은 새 영웅을 경계한 툭테긴의 소행이라 여겼다.[* 심지어 보두앵 역시 그리 여겨 자신의 대장을 신의 집에서 죽인 민족은 망해야 마땅하다며 비꼬았다] 비난 상쇄를 위해 툭테긴은 알레포의 알프 아르슬란을 도시로 초청하여 대십자군 동맹을 맺었다. 비록 9월 후자가 암살였지만 새 군주 룰루와 동맹을 유지하였고, 마르딘의 일가지 역시 도시로 초청해 동맹을 맺었다.[* 1115년 1월 일가지는 디마슈크를 향하던 중 홈스의 키르한에게 포로가 되었고, 아들 아야즈를 인질로 겨우 풀려났다] 심지어는 안티오크 공 로제르까지 끌어들여 반 술탄 연합을 맺었다. 따라서 마우두드의 후임으로 파견된 부르수크는 툭테긴의 보급기지 하마를 점령하였다. 따라서 1115년 툭테긴-룰루-일가지는 십자군과 함께 진군하였고, 비록 사르민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회군했지만 분노한 술탄 [[무함마드 1세]]는 십자군에 대한 개입을 중단을 결심하였다. 이번엔 십자군이 너무 강력해졌다고 여긴 툭테긴은 이듬해 4월 바드다드를 방문해 술탄에게 용서를 빌었고, 디마슈크와 홈스의 지배자로 책봉받았다. 그후 재차 부르수크가 파견되었고, 툭테긴은 그와 트리폴리 백작 퐁스를 격파했지만 이듬해 그가 사망하였고 1118년에는 술탄 무함마드 역시 사망하며 중앙군의 개입은 끊겼다. 따라서 툭테긴은 알레포를 장악한 일가지, 샤이자르의 문키드 조와 대십자군 동맹을 맺었다. 1119년 6월 킨나스린에서 합세한 연합군은 아제르 상귀니스 전투에서 안티오크 공 로제르를 전사시키고 자르다나를 장악하였다. 툭테긴은 일가지의 만류에도 자르다나 영주 로베르를 처형하였다. 다만 예루살렘 국왕 보두앵 2세[* 툭테긴은 막 즉위한 그에게 요단강 동안 할양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한바 있다]의 반격으로 안티오크 점령은 실패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