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마스쿠스 (문단 편집) ====== 십자군의 위협과 동맹 ====== 1120년, 일가지와 툭테긴은 재차 연합 작전에 나섰으나 보두앵 2세와 대치하다가 1년 휴전을 맺었다. 한편 1123년 파티마 조는 십자군의 공격이 임박한 티레를 툭테긴에게 매각하였다. 이듬해 툭테긴은 7백의 증원군을 파견하고 일가지의 후계자 발라크와 아자즈를 공격해 주위를 분산시키려 했지만 포위는 진행되었다. 티레 구원을 약속했던 발라크가 급사함과 함께 바니야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툭테긴은 십자군이 다가오자 디마슈크로 철수, 티레의 항복 협상을 도와 주민들의 안전을 확보하는데 그쳤다. 1125년 6월, 툭테긴은 새롭게 알레포를 장악한 알 보르소키와 함께 아자즈 전투를 치렀으나 패배하였다. 보복으로 그해 10월 디마슈크를 습격한 보두앵은 이듬해 도시에 대한 직접 공격에 나섰다. 1126년 1월 16일에 요단강을 건넌 보두앵은 사도 바울의 개종일을 이틀 남긴 23일, 바울의 개종 장소로 알려진 디마슈크 남쪽의 마르즈 앗 사파르에 당도하여 진영을 세웠다. 다음날 툭테긴 역시 홈스의 아사신을 포함한 군대와 당도하였고, 양측은 26일 격돌하였다. 결과는 디마슈크 측에 유리한 무승부였는데, 다만 툭테긴이 낙마했다는 소문에 군대가 철수하며 추격하지는 못하였다. 이후 그해 11월, 툭테긴의 재상 알 마즈다가니는 도움의 대가로 아사신에게 바니아스를 할양하였다. 그리고 약 1년이 지난 1128년 2월, 툭테긴은 약 70이 넘는 고령으로 사망하였고 아들 타즈 알 물크 부리가 계승하였다. 한편 보두앵 2세는 디마슈크 정복에 대한 염원을 잃지 않고 이를 위해 서유럽에서 십자군을 모집한 결과, 1129년 5월 그의 사위인 풀크 등의 병력이 당도하였다. 다른 십자군 제후들까지 소집하던 보두앵은 그해 9월 말, 부리가 친아사신 재상 알 마즈다가니를 처형한 것을 계기로 시민 봉기가 일어나 아사신이 학살당한 후 바니아스의 아사신이 항복해오자 출정하였다. 바니아스를 접수한 십자군은 디마슈크로 진군하였다. 1129년 11월, 부리 역시 출정하여 도시 남쪽 10km 의 다리에서 십자군과 대치하였다. 한달 후 그는 십자군이 약탈로 분산된 틈에 공격하여 승리하였고, 이후 폭풍이 불자 그들은 철수하였다.[* 승리 후 부리는 연회를 열었던 터라 십자군에게 좋은 반격 기회였는데 폭풍을 신의 징벌로 여겨 퇴각함] 한편 1128년부터 알레포와 모술을 지배하던 장기가 1130년 동맹을 제안하였고, 이를 수락한 부리는 하마 태수 사윈지와 아들 세비츠 휘하 5백 기병대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장기는 알레포에 그들이 도착하자 감금해버리고 부리가 5만 디나르의 몸값을 제안했음에도 거절하곤 하마를 점령, 홈스를 포위하였다. 비록 장기는 돌아갔지만 1131년 5월 부리는 호위대로 위장 취업한 아사신에게 찔려 중상을 입는다. 그해 10월, 포로가 된 베두인 군벌 두바이스와 세비츠를 교환한 부리는 1132년 6월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하였고 장남 샴스 알 물크 이스마일이 계승하였다. 보두앵 사후 예루살렘 왕국이 내전에 빠진 틈을 타 그는 12월에 바니아스를 점령, 디마슈크의 안전을 확보하였다. 하지만 태후 주무르드와 대립하던 이스마일은 전자의 애인인 전 와지르 유수프를 죽이려 하였는데, 그녀에게 저지되었다. 그리고 1134년 암살 위협을 받은 후 사르카드 성채로 피신한 이스마일은 이듬해 1월 알레포의 장기에게 디마슈크 할양을 제안하며 보호를 청하였다. 이에 장기는 남하하였으나 다다르기 전에 주무르드는 이스마일을 죽이고 동생 시하브 앗 딘 마흐무드를 옹립하였다. 1135년 2월 4일, 구타 평원에 당도한 장기는 디마슈크를 포위하였는데 장군 우누르의 저항과 압바스 칼리파 [[알 무스타르시드]]의 만류로 다음달 철수하였다. 한편 1136년 맘루크 출신의 바르자와쉬가 대낮에 광장에서 유수프를 죽이고 실권을 장악하였다. 정당성 확보를 위해 지하드에 나선 그는 이듬해 3월 트리폴리를 공격하였고 백작 퐁스를 사로잡아 처형하였다.[* 패배 후 도주하던 중 마론파 기독교도 루이에게 붙잡혀 넘겨짐] 8월엔 장기가 바린 전투에서 십자군을 격파한 틈에 나블루스를 습격하였다. 그러나 1138년 5월 바르자와쉬 역시 암살당하였다. 이 틈을 노린 장기는 재차 남하하였다. 그러자 주무르드는 그에게 청혼하였고, 8월 치러진 결혼식에서 지참금으로 홈스를 얻은 장기는 회군하였다. 1139년 6월 마흐무드 역시 암살당하자 전 홈스 태수 우누르가 그 이복동생 자말 앗 딘 무함마드를 옹립하곤 그의 모친과 결혼해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에 다른 왕자 바흐람샤는 장기에게 망명하였다. 그후 주무르드의 요청으로 장기는 재차 남하했는데, 바알벡 함락 시에 보인 잔혹함 때문에 12월 그가 디마슈크를 봉쇄하자 주민들은 결사 저항을 결의하였다.[* 장기는 무함마드에게 항복하면 홈스나 바알벡 준다 하였고 이에 그가 혹하였으나 우누르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우누르는 1140년 연공과 바니아스 할양을 대가로 십자군과 동맹하였다. 한편 그해 3월 무함마드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무지르 앗 딘 아바크를 옹립하였다. 그후 십자군과 우누르가 바니아스에서 합세하자 바알벡으로 후퇴했던 장기는 전자가 철수하자 6월에 재차 디마슈크를 포위, 아바카로부터 자신을 쿠트바에 언급하는 형식적인 복종을 얻어내곤 회군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