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마스쿠스 (문단 편집) === 고대 === [[파일:다마스쿠스 유피테르 신전.jpg|width=800]] 하미디예 시장의 로마 시대 유피테르 신전 유적 전쟁이 끝난 후 아시리아의 개입을 촉발한 유다의 왕 아하스는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를 알현하기 위해 디마슈크에 당도하였다. 구약 열왕기하 16장에 의하면 복속을 표한 후 하다드 신전을 들른 아하스는 그 제단의 장엄함에 감탄하여 예루살렘에 그를 모방한 제단을 세우게 하였다. 당시 디마슈크가 얼마나 대단한 도시였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 한편 100년간 이어진 아시리아 제국의 치하에서 디마슈크는 비록 정치적 중요성은 상실했을 지언정 레반트에서의 경제, 문화적 중요성을 유지하였다. 동시에 아람인들의 저항 운동의 중심지이기도 했는데, 기원전 727년 반란이 일어났으나 아시리아군에게 진압되었다. 이후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가 시리아 일대의 반란 세력에 대한 전면적인 평정에 나서며 디마슈크는 아시리아에 완전히 종속되었다. 이어지는 안정기에서 디마슈크는 유향 등 아라비아산 향신료 무역의 거점으로써 번영하였다. 당시 지명은 '샤 이메리수'였고, 총독에 의해 통치되었다. 기원전 609년 [[칼데아]], [[메디아]]의 협공으로 신아시리아 제국이 멸망하자 약 500년만에 이집트가 파라오 네코 2세의 아시리아 구원 시도를 계기로 재차 시리아 남부를 점령하였다. 다만 기원전 572년까지 시리아 전부는 신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게 정복되었다. 다만 칼데아 지배기의 디마슈크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고, 반세기도 안되어 [[키루스 2세]]의 [[아케메네스 제국]]령 에베르 나리(아라미아)에 소속되어 그 주도가 되었다. 약 200여 년간 페르시아 통치를 받으며 디마슈크는 다시 안정기를 보냈다. 아케메네스 조 특유의 관대한 통치에 따라 디마슈크의 총독은 남쪽 암몬([[암만]])의 태수를 임명하는 등 상당한 자치권을 누렸다. 그리고 디마슈크의 중심이던 하다드 신전에서 티레 등지에서 나타나는 페르시아 양식의 건축[* 회랑으로 둘러쌓인 넓은 뜰과 중앙의 대형 건물, 균형미를 위한 벽면의 탑 등]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이때 증축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전에 이란 신화의 여신 아나히타의 신상이 바쳐진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기원전 333년, [[이수스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을 격파한 [[알렉산드로스 3세]]는 패주한 [[다리우스 3세]]를 추격하는 대신 이집트 정복을 목표로 지중해를 따라 남하하였다. 내륙 도시들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던 알렉산드로스는 사트라프의 주도인 디마슈크에는 부관 [[파르메니온]]을 파견하였다. 당시 시리아의 핵심 도시이던 디마슈크는 이수스 전투를 앞두고 페르시아 측의 후방 도시로써 막대한 보급품이 있었는데, 다리우스 3세의 보물 및 후궁들도 함께였다. 후자의 존재를 고려해 볼 때에 당시 디마슈크가 성벽이 둘러진 큰 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파르메니온은 포위를 위한 최소한의 병력과 겨울의 눈보라를 뚫고 기원전 332년 초엽 도시 북쪽의 칼라문에 당도하였다. 유혈사태를 원치 않았던 페르시아 측 총독은 그에게 항복 사절을 보내며 다리우스 3세의 보물을 넘겨줄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는 페르시아 주둔군을 보물과 후궁들을 호위하게 한 후 내보냈고, 마케도니아 군은 이들을 기습해 격파하였다.[* 이때 음악에 단련된 329명에 달하는 후궁들과 헤아릴 수 없는 금제 장식들이 마케도니아 인들의 수중에 들어갔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