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마스쿠스 (문단 편집) ==== 셀레우코스 왕조 ==== ||[[파일:알렉산드로스2세.jpg|width=600]]||[[파일:1014px-Syria_under_the_Seleucids_92_BC.svg.png|width=300]]|| 디마슈크에서 주조된 알렉산드로스 2세의 은화 / 기원전 95년, 삼분할된 셀레우코스령 시리아 안티오코스 3세 메가스가 로마에 패하고[* 이 패전으로 체결한 아파메아 조약으로 그리스가 사실상 로마령이 되며 셀레우코스 조의 그리스인들은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시리아 일대에 뼈를 묻게 된다. 이로써 디마슈크 역시 퇴역병들이 정착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그 후계자인 안티오코스 4세가 에피파네아 (하마)로 대표되는 헬라화에 공을 들인 점도 있었다] 사망한 후 셀레우코스 조는 서서히 쇠퇴하였다. 후계자인 안티오코스 4세, 데메트리오스 1세, 안티오코스 7세가 일시적인 중흥을 이룩했으나 모두 약 10여 년간의 통치 끝에 요절하거나 살해되었다. 그동안 유대 지방에선 봉기가 일어나 [[하스몬 왕조]]가 세워졌고 동쪽에서 [[파르티아 제국]]이 흥기해 이란과 메소포타미아를 정복하였다. 따라서 셀레우코스 조는 시리아 일대로 축소되었고, 비로소 기원전 134년 화폐 주조소가 생기는 등 디마슈크의 중요성이 회복되었다. 안티오코스 7세의 동생이자 후계자인 데메트리오스 2세는 국력을 만회하고자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내분에 개입해 이집트로 진격했는데, 펠루시움에서 패배하였다.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보복으로 안티오코스 7세의 손자임을 자처하던 이를 알렉산드로스 2세로 옹립, 군대를 주어 안티오크를 장악하게 하였다. 다만 데메트리오스가 코엘레 시리아에 웅거하며 내전이 이어졌다. 기원전 125년 초엽, 알렉산드로스 2세는 디마슈크 부근에서 데메트리오스를 격파하였고, 후자는 프톨레마이스 ([[아크레]])를 거쳐 티레로 향했으나 그곳에서 살해되었다. 다만 2년 후 데메트리오스의 아들 안티오코스 8세가 이집트의 지원으로[* 알렉산드로스 1세와 데메트리오스 2세 때와 마찬가지로 프톨레마이오스 조는 자신들이 즉위를 도와준 국왕을 다시 폐위시키는 전략을 구사하며 셀레우코스 조를 약화시켰다] 알렉산드로스 2세를 격파, 처형하고 내전을 종식시켰다. 이후 평화가 이어지나 싶더니 기원전 116년에 유배지에서 돌아온 안티오코스 8세의 사촌이자 이복동생인 안티오코스 9세가 반란을 일으켰다. 얼마간의 싸움 끝에 그들은 왕국을 반씩 분할하였고, 이후 상호 공존하였다. (기원전 111년) 코엘레 시리아를 얻은 안티오코스 9세는 안티오크를 대신해 디마슈크를 수도로 삼아 그리스식 도시를 세웠고, 제우스-하다드[* 전자는 번개를 쥔 하늘의 신, 후자는 폭풍의 신이었기에 동일시 될 수 있었다] 신전의 동쪽에 장방형 도로와 아고라가 조성되었다.[* 즉, 종교적 & 상업적 중심지를 이어준 것이다] 현재 알 카이마리예 거리의 열주가 그 흔적이다. 한편 기원전 96년 안티오코스 8세가 사망하자 안티오코스 9세가 단독 국왕이 되었고 시리아는 다시 통합되었다. 하지만 같은해 안티오코스 8세의 아들 셀레우코스 6세가 봉기해 안티오코스 9세를 죽이고 왕이 되었다. 그리고 그 역시 이듬해에 사촌이자 안티오코스 9세의 아들인 안티오코스 10세에 패해 죽는 등 혼란이 이어졌다. 그러던 그해 말엽, 안티오코스 8세의 또다른 아들인 데메트리오스 3세가 이집트의 지원을 받아 왕을 칭하였고, 숙부처럼 디마슈크를 수도로 삼았다. 기원전 90년, 그는 디마슈크를 '데메트리아스'로 명명하였다. 한편 셀레우코스 조의 내전을 틈타 하스몬 왕조는 고대 이스라엘 왕국의 강역을 장악하고 디마슈크를 위협했는데, 데메트리오스 3세는 그 내전에 개입하여 국왕 알렉산드로스를 격파하였다. 이후 기원전 89년 안티오코스 10세가 파르티아 원정 중 전사하자 데메트리오스 3세는 안티오크를 얻으며 시리아 대부분을 수중에 넣었다. 그러나 이내 동맹이던 동생 필리포스 1세와 대립하게 되었고 그의 거점인 베로이아를 공격하였다. 이에 필리포스 1세는 파르티아-[[에메사]] 군의 도움으로 형을 격파, 사로잡으며 내전을 종식시켰다. (기원전 87년) 그러나 그의 다른 동생 안티오코스 12세가 또다시 이집트의 도움을 얻어 디마슈크에 궁정을 차렸고, 재차 시리아는 남북으로 양분되었다. 안티오코스 12세는 현지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제우스 외에 하다드 신을 동전에 세겼고, 남쪽의 하스몬 왕조와 신흥 아랍 세력인 [[나바테아 왕국]][* 유향 무역으로 이익을 보고 있었는데 하스몬 왕조가 기원전 100년에 가자를 점령해버려 해상 교역이 막히자 내륙의 팽창을 도모해 기원전 90년 무렵에는 디마슈크 남쪽 [[하우란]]까지 진출한 상태. 그 외에도 셀레우코스 조의 쇠퇴를 틈타 [[에메사]]의 삼프시케라무스 1세는 디마슈크 북쪽 70km의 아브루드까지 영토를 넓혔고, 유목민 계열인 이트레아는 레바논 베카 협곡에서 골란 고원까지를 지배하며 디마슈크와 페니키아 간의 교역을 차단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아랍계열로, 셀레우코스 조의 헬라화 노력에도 결국 현지 셈계 민족들을 이겨내지 못한 것]을 공격하였다. 그의 원정 동안 필리포스 1세가 남하해 디마슈크 시타델을 맡던 밀레시오스의 내통으로 도시를 무혈 점령하였다. 하지만 밀레시오스는 예상과 달리 아무런 대가를 받지 못하자 필리포스 1세를 배신, 그가 성 밖의 히드포룸에 있던 틈에 성문을 걸어잠궜다. 그리고 원정에서 황급히 돌아온 안티오코스 12세는 수도를 되찾았다. 그러나 그는 2년 후인 기원전 82년, 카나 전투에서 나바테아의 [[아레타스 3세]]에게 패하고 처형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