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산초당 (문단 편집) == 상세 == 다산초당은 다산 정약용이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해 강진으로 귀양을 와서 18년 중 10년동안 생활하던 집이다. 이곳에서 정약용은 유배가 끝날 때까지 생활하며 학문에 몰두한 끝에 [[목민심서]]를 비롯한 숱한 저서들을 남겼다. 1800년 다산을 총애했던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다산의 시련이 시작되었으며 이듬해인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게 되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조선 가톨릭 신자이자 다산의 조카딸[* 다산의 큰형인 정약현의 딸이다.] 사위로 알려진 황사영[* 조선의 천주교 신자로 다산의 큰형 정약현의 사위이자 다산의 조카딸 사위이며 다산의 셋째형 정약종의 제자이다.]이 청국에 있는 가톨릭 주교인 구베아 주교에게 백서(帛書)[* 명주 비단에 글을 썼다는 뜻]를 보낸 사건이 발생하였으며(황사영 백서 사건)[* 현재 이 백서의 원본은 [[바티칸 시국]]의 로마 교황청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여기에 보수 유학파(儒學派) 신하들로부터 서학(西學, 가톨릭 교리)에 물들었다는 이유로 인신 공격과 모함까지 이르면서 결국 현재의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정약용이 처음부터 이곳에서 18년 간의 강진의 유배 생활을 한 것은 아니다. 처음엔 강진 읍내의 주막인 동문매반가(東門賣飯家)에서 주모의 호의로 4년간 생활하였는데 정약용은 이 주막에 사의재(四宜齋)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야사로 이 주모의 딸이 정약용을 흠모한 끝에 정약용과 '통'하여 자식을 낳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사의재는 강진군이 2007년에 복원해서 문화 관광 해설을 제공하는 장소로 쓰이고 있다. 이후 고성사의 보은산방, 학래 이청(정약용의 제자)의 집 등을 전전하다가 47세이던 1808년 봄에 윤단(尹慱, 1744~1821)의 산정(山亭)인 귤동의 초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다산을 초당으로 초빙한 이는 윤단의 아들인 윤규로(尹奎魯, 1769~1837)였다. 윤규로는 자신의 네 아들과 조카 둘을 다산에게 배우게 했다. 다산은 18년(1801~1818)의 유배 기간 동안 다산초당에서 11년가량(1808~1818)을 머물렀다. 다산이 윤단의 산정으로 오게 된 것은 어머니가 해남 윤씨였기 때문이다. 외가 쪽 친척의 소유였던 산정으로 거처를 옮긴 것이다. 다산의 외가는 해남윤씨로 고산 윤선도의 가문이다. 다산초당의 원래 주인인 윤단은 윤복의 6대손이고, 윤복의 형인 윤형의 5대손이 인물화에 탁월했던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 1668~1715)이다. 공재는 윤선도의 증손자이기도 한데, 공재의 셋째 아들 윤덕렬의 딸이 다산의 어머니이니, 공재의 손녀이다. 결국 산정의 주인인 윤단은 다산에게 먼 외가 친척인 셈이다. 다산초당은 1963년에 사적 제107호로 지정받았다. 다산초당에 걸린 현판은 추사 [[김정희]]가 쓴 글씨로 알려져 있다. 이름의 초당(草堂)에서 알 수 있듯이 본래는 작은 [[초가집]]이었으나, 복원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현대의 정면 5칸, 측면 2칸의 [[기와집]]으로 중건하였다. [[강진군]]에서는 다시 이를 초가집으로 복원하겠다는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90601010314430610010|계획]]을 세웠으나 2018년까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