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다이리 (문단 편집) === 초기 이력 === [[청나라]] [[저장성]] 장산현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다이춘펑(戴春風). 아버지를 4살때 일찍 여의고 어렸을 때는 한학을 수학하다가, 신식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16세 때 고등학교에서 도박(...)을 하다가 징계를 받아 제적되었고 학교를 나와 방황했다. 이때 상하이에 와서 암흑가에서 구르다가 도박에 재능이 있음을 알게 되어 전문 도박사로 큰 돈을 벌게 되었다. 이때 [[청방]]의 두목 두웨성(두월생)과 알게 되었고, 두웨성은 그를 장제스에게 소개해서 장제스와도 친분을 트게 되었으며 [[다이지타오]], [[천궈푸]] 등 국민당의 주요 인물들과 두루 인연을 맺었다. 이후 1920년대에 상하이에서 개인기밀조사요원으로 일했다. 다이리는 어느날 도박에서 판돈을 모조리 잃어버리면서 도박에서 손을 씻고 같은 절강성 출신인 다이지타오의 후원과 두웨성의 추천서를 받아 초등 시절부터의 친구인 마오런펑[* 毛人鳳(1898~1956). 역시 국민당군의 정보 계통의 장성을 지냈다. 상장까지 오름.]과 함께 1926년 29세의 나이로 [[황포군관학교]] 6기에 편입했다. 이후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진 못했으나 훗날 명예 학위를 받았으며, [[중국국민당]]에도 입당하였다. 이름도 너무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춘펑(춘풍, 봄바람)에서 삿갓을 뜻하는 리(笠, 립)로 바꾸었는데, 나중에 정보 기관의 총수가 되는 그의 미래를 감안한다면 참으로 적절한 이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철저한 장제스 교장의 추종자였던 그는 공산당원이자 학교 정치 주임인 [[저우언라이]]의 영향권 아래 있는 좌익 학생들의 동향을 은밀히 상부에 보고했고, 이렇게 모은 정보는 장제스가 후에 [[중산함 사건]]을 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어 [[국민당의 1차 북벌]]이 시작되자, 그는 정보전과 공작에 재능을 보여 여러 요원들을 풀어서 군벌군들의 정보를 수집했고 심지어는 자객을 보내 군벌이나 그 유력 지휘관들을 암살, 포섭하는 공작을 맡았다. 이런 활동은 국민당군이 파죽지세로 북벌을 하고 결국 베이징까지 함락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북벌 후에도 이런 첩보 활동은 장제스가 여러 반장파들의 공격을 분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