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이리 (문단 편집) == 평가 == >다이리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가 중국에서 가장 두려운 자가 된 이래 미소 속에 숨은 잔인함이 보인다고 말했다. 하지만 다이리는 국민당의 다른 많은 수뇌부들이 갖추지 못한 개인적인 지도력을 갖춘 영리한 정객이었다. 무엇보다 어떠한 경우일지라도 장제스를 보호하기 위한 준비를 늘 갖추고 있었다.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291페이지. 다이리는 그 능력으로 적과 아군에게 모두 높이 평가받았다. 다이리가 죽자 장제스는 수도 난징의 한 거리를 그의 자를 따서 우농로라고 개칭했으나, 3년도 안되어 난징은 공산당에 함락되었고, 장제스는 새로운 수도로 삼은 [[타이베이]]의 한 거리를 우농로(위눙루)라고 이름붙였다. 이 우농로는 아직도 남아 있다. 또한 장제스는 [[국부천대|대만으로 패퇴]]하면서 "다이리가 살아 있었으면 대륙을 잃지 않았을 텐데(若雨農不死,不至失大陸)"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저우언라이]] 또한 "다이리의 죽음으로 중국 공산당의 혁명은 10년 앞당길 수 있을 것(戴笠之死,中国共产党的革命,可以提前十年成功)"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다이리와 장제스와 모두 가까웠던 청방 두목 두웨성도 "다이리가 있었으면 공산군은 절대로 장강을 건너지 못했다."고 한탄했다. 대만에서는 기념관까지 세워질 만큼 높이 평가받았으나, 공산당은 다이리의 공작에 수많은 당원이 학살당했기 때문에 이를 갈았다. 그리하여 국공내전 때 미처 피난 가지 못한 다이리의 외아들인 다이산우(戴善武)를 체포해 1951년 처형함으로써 분풀이를 했다.[* 난징을 함락시키고 조사통계국 자료를 접수한 공산당은 철저히 보복을 했다. 조사통계국 요원이나 빨대들 수십만명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고. 물론 당시에는 대륙에는 국민당 잔당들이 상당수 많아 있는데다가, 서부에서는 국민당군의 유격대나 잔여군벌의 저항이 계속 벌어지는 등, 정권이 확립된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잠재적 불안 요소를 제거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러자 대만에 있던 친구 마오런펑은 공작원을 보내 다이리의 손자를 비롯한 유가족들을 대만으로 도피시켰다. 하지만 공산당도 시간이 지나면서 다이리가 항일전에서 공헌한 바는 높이 평가하고 있다. 다이리가 뿌린 여러 역정보들은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에게 다시 활용되어 수많은 공산당 고관들이 홍위병에게 박해당하거나 자살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암흑가의 도박사에서 정보 총수로 변신하는 삶의 이력이 워낙 파란만장하고, 능력이나 활약이 대단했기 때문에, 중국 본토와 대만에서는 그를 행적을 다룬 책이 여러 권 출판되었다. "장제스의 힘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지만, 그는 힘러와는 달리 매우 조용하고 공개석상에 나오기를 꺼리는 성격을 가졌다. 그래서 "중국에서 가장 신비로운 인물"이라는 별명이 뭍기도 했다. 사진찍는 것도 매우 싫어했다고. 그러나, 다이리가 벌인 여러 공작이나 암살은 결과적으로 장제스 정권의 이미지를 독재정권으로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상 장제스 정부가 벌인 여러 무리수들은 대개 다이리의 책임. 이렇기 때문에, 사생활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대체로 당시 중국 고위직이나 암흑가 출신들은 호색이 일반적이지만, 다이리의 경우는 확인이 잘 안된다. 1939년 와이프 마오슈충(毛秀丛)과 사별했다. 그런데 1938년 국통 소속 여간첩 리리(李麗)가 낳은 아이가 다이리의 자식이라는 소문이 있다. 이후 리리는 일본군 장성을 유혹해서 정보를 빼냈고, 이 정보로 국민당군은 큰 전과를 올린다. 워낙 사망이 갑작스러웠기 때문에 여러 음모론이 돌았다. 먼저 내전에 앞서 최대의 적을 제거하려는 공산당 공작기관 총책인 [[캉성]]과 리커눙(李克農)[* 캉성은 방첩, 리커눙은 공작이 전공이었다. 리커눙의 가장 큰 업적은 장제스에게 서운하거나 불만을 가지고 있던 [[장쉐량]]과 [[양후청]]을 포섭해서 [[서안 사건]]을 일으킨 것. 이외에도 온갖 공작으로 국민당에 첩자를 심고, 군벌들을 회유하여 공산당의 집권에 큰 역할을 했다. 중국에서는 다이리의 라이벌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그 업적으로 리커눙은 한번도 부대를 지휘한 적이 없지만 인민해방군 상장까지 올랐다. 제네바에서 열린 [[한국전쟁]] 휴전협상에서 중국측 대표로 참가하는 등 외교 커리어도 있다.]의 소행이라는 설이 있고, 또는 [[국공내전]]이 다시 발발하는 것을 두려워한 미국 [[OSS]] [* 당시에 미국은 지나치게 냉전이 심화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장제스가 공산당을 토벌하려는 것을 말리려는입장이었다.]가 지나친 강경파인 다이리를 제거했다는 설, 또는 다이리와 사이가 나빴던 국민당내 분파들 ([[쑹메이링]] 또는 [[CC단]]계열)이나, 또는 다이리의 자리를 노린 부하들의 소행이라는 설이 있다.[* 근데 당시만 하더라도 비행기가 그다지 안전한 이동수단이라고 볼 수 없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비행기사고로 사망했다. 공산당 측에서도 비슷한 시기인 1946년 4월 고위 지도자인 예팅, [[덩파]], [[보구]]가 충칭에서 옌안으로 돌아오던 도중 추락사고로 사망. [[마오쩌둥]]도 장제스와 회담하기 위해 충칭행 비행기를 탄 것 이외에는 비행기를 기피하였다. 집권후 유일한 외유로서 스탈린을 만나러 [[모스크바]]에 갈 때도 기차를 이용했다. 반면 장제스는 전용기(메이링이라고 이름 붙은 [[C-47]] 수송기)를 가지고 있었고, 내전의 와중에서도 계속 비행기로 중국 전토를 누비며 독전했다. 심지어는 한국까지 와서 [[이승만]]과 회담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장제스가 자신을 더 이상 신임하지 않는다 여겨 자살해버린 것이라는 설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