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자이후 (문단 편집) == 개요 == '''다자이후'''(太宰府; 태재부)는 [[야마토|고대 일본]]에서 조정의 사무를 일부 분담할 목적으로 설치한 지방행정기관 겸 특수행정구역으로, 지금의 [[후쿠오카현]] [[다자이후시]]에 위치했다. 현 다자이후시 명칭의 유래이기도 하다. 다자이후 일대는 [[한반도]]의 [[신라]], [[고려]]나[* [[발해]]는 [[규슈]]와 거리가 멀기 때문에 일본에 사신을 보낼 때 다자이후가 아니라 [[동해]] 바다를 가로질러 [[호쿠리쿠]]에 다다르는 항로를 주로 이용했다. 물론 [[대한해협]]보다 훨씬 먼 바다를 항해하는 셈이라 매우 위험하여 발해 사신단 관련 기록을 보면 굉장히 사고를 자주 당한다. 배는 거의 망가지고 사람만 간신히 도착해 귀국할 때는 일본 배를 빌려 타고 간 적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간신히 도착했는데도 [[아이누족]] 원주민의 습격을 당해 대부분이 몰살당한 경우도 있다.] [[중국]] 역대 왕조와 가까운 [[규슈]]의 관문으로서 고대 일본의 대외 외교 창구이자 국방의 최전선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바다 건너편 한국의 [[부산]]에 설치됐던 [[왜관]]과도 비슷한 역할을 했던 셈이다. 당대 일본의 수도권인 기나이(畿内)는 여기에서 거리가 먼 [[간사이]] 지방[* [[교토]]와 [[나니와]](難波; 오사카) 일대에 해당했다. 시대별로 헤이조쿄(平城京; 나라시), 헤이안쿄(平安京; 교토부) 등 다소 이동이 있었다.]에 있었기 때문에 여기는 따로 고위 귀족을 파견하고 상당한 실권을 맡겼다. 물론 [[교토]]와 거리가 먼 변방이다보니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처럼 수도에서 밀려난 인물이 좌천되다시피 하는 장소로 인식되기도 했다. [[신라]] 전성기에는 신라 사신단을 맞이하는 장소이자 무역 창구로 번성했으나 [[신라구]]가 기승을 부리던 9세기 말에는 이곳도 약탈당했다. [[고대]] 이래로 규슈 지역의 [[정치]] 중심지이자 [[경제]], [[문화]]적으로도 중요한 곳이었지만 조정의 통치가 무너지는 [[중세]]에 접어들며 기능이 차츰 약화되었고, 근현대에 들어서는 인근의 [[항구도시]] [[후쿠오카]]가 규슈 일대 최대의 [[도시]]가 되었고 다자이후는 후쿠오카 외곽의 소도시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