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자이후 (문단 편집) == 역사 == [[츠쿠시]][* 후쿠오카 일대의 옛 지명. [[율령제]] 이후 [[지쿠젠]]과 [[지쿠고]]로 나누어진다.](筑紫; 축자) 다자이후라는 이름이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671년 [[덴지 덴노]] 때지만 그전에도 이 지역에 미야케(官家)를 두어 훗날 다자이후가 맡는 외국 사신 접대 등의 업무를 맡겼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이 있다. 이르게는 [[삼국지]] 위지 왜인전에 나오는 일대솔(一大率)을 기원으로 보기도 한다. [[660년]]에 백제가 멸망했을 때 일본의 덴지 덴노는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2만 7천 명에 이르는 군사를 한반도로 파병했지만, [[백강 전투|이들은 백강 어귀에서 당의 수군 7천(+신라의 육상지원병)에게 대패하게 된다.]] 덴지 덴노는 이후 신라와 당이 일본으로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이원복 교수가 그린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에서는 백강 전투 이후 덴지 덴노가 왕권을 강화하려는 시책에 대해서 반발하는 신하들에게 닥치라고 찍어누르면서 "'''지금 언제 신라가 당나라와 함께 쳐들어올지도 모르는데, 호족들이 자기 권리만 찾고 있을 때냐? 이런 위협적인 시국일수록 덴노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야지!'''"라고 버럭하는 장면을 넣어, 덴지 덴노가 백강 전투 이후 신라-당나라 연합군이 일본 본토로 쳐들어올 수도 있는 위협적인 상황을 내세워 황권 강화에 써먹은 것처럼 그리고 있다.] 백제 유민들을 동원해 일본 각지에 고구려식 산성(고식산성)을 축조했고, 외부로부터의 침략이 있을 때 가장 먼저 적에게 노출될 수 있는 규슈 일대를 총괄하는 쓰쿠시도독부(筑紫都督府)를 설치했다. 이것이 다자이후의 유래다.[* 다자이후 정청 터 바로 위에 조선식 산성의 하나인 오노 성(大野城)이 위치하고 있다.] 다자이후는 일본어 음독이고, 훈독으로는 오호미코토모치노 쓰카사인데[* 이 오호미코토모치(大宰)의 미코토모치(宰)의 경우 중앙에서 특별히 파견하는 관리직을 가리키는 용어였는데, [[임나일본부설]]의 여러 학설 가운데 부(府)의 일본어식 훈독 또한 미코토모치라는 점에 주목해 임나일본부의 정체가 실은 가야에 외교적 목적을 띠고 파견된 일회성 사신이 아니었나 하는 주장도 존재한다. 다만 여기에 대해서는 겨우 일회성으로 한 번 보내고 끝일 사신에게 백제에서 임나 지역에 설치한 군령과 성주를 야마토에 복속시키게 한다는 지나치게 막중한 임무를 주는 것이 부자연스럽다는 지적도 존재한다.] 쓰쿠시 즉 지금의 규슈 지역의 군사적 방위를 책임지는 '''서부지방군사령부''' 역할을 맡고 있었다. 서일본 일대에 설치된 사이카이도(西海道) 소속 9개 구니(国)[* [[규슈]] 섬에 설치된 히젠 • 히고 • 지쿠젠 • 지쿠고 • 부젠 • 분고 • 사쓰마 • 오스미 • 휴우가의 9개 행정구역을 뜻한다. 규슈(九州)라는 이름도 이 9개 구니에서 나온 것.]와 3개 섬[* 쓰시마, 이키, 그리고 다네가시마.]의 인사 및 감사 등의 역할을 모두 다자이후가 맡고 있었고, 신라나 당과의 관계가 정상화되고 군사적인 역할이 줄어들고 나서도 외교적으로 오히려 중시되어서 하카타 연안에 고료칸(鴻臚館)을 설치하고 다자이후의 감독 아래 외국 사신의 접대 및 상인의 관리 업무가 이루어졌다.[* [[신라]]나 [[발해]]의 사신들에게 으레 다자이후를 거쳐서 오도록 명령하거나 다자이후에서 사신을 그냥 돌려보내는 대목이 자주 보인다.] 고대 일본에서는 기나이의 조정과 함께 수도에 준하는 위치에 있었지만, 교토에 비하면 격이 떨어졌다. [[나라 시대]]인 [[740년]]에 후지와라노 히로츠구(藤原廣繼)라는 인물이 다자이후의 쇼니로 [[좌천]]된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을 정도. 쇼니는 차관직이고 다자이후의 장관은 다자이노소치(大宰帥)라고 불렀는데, 도고쿠처럼 친왕임국(親王任國)[* 고대 일본에서 도고쿠의 [[카즈사]](上總), [[고즈케]](上野), [[히타치]](常陸)의 경우는 해당 구니(國)의 지방관인 카미(守)를 다른 관리가 아니라 덴노의 친아들 즉 [[친왕]]으로 임명했다.]으로 종3위 정부 고관 및 [[친왕]]이 임명되는 자리였지만 이들은 관직만 맡아놓고 실제부임지에는 가지를 않아서[* 이는 도고쿠의 친왕임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타이라노 마사카도]] 항목 참조.] 곤노소치(權帥)가 있기는 했지만 조정 대신이 다자이후의 곤노소치가 되는 경우 실무권한이 거의 없었다. 때문에 우대신[* 한국으로 치면 [[우의정]]급. 이는 좌대신(좌의정)도 마찬가지다.]이었던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좌대신 후지와라노 도키히라와의 정쟁에 밀려 다자이곤노소치로 부임해오게 된 것은 좌천과 다름없는 처우였다. 자연스럽게 다자이후의 실권은 차관직인 쇼니(少貳)가 맡게 되었다. 타이라노 마사카도의 난 때는 비슷한 시기에 서쪽에서 반란을 일으킨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반란에 의해 불타기도 했다. 남북조 시대에서 무로마치 시대에 이르러 활약한 [[슈고 다이묘]] [[쇼니씨|쇼니]](少弐) 씨는 후지와라를 [[우지(성씨)|혼세(本姓)]]로 하는 가마쿠라 시대 초기의 인물 무토 스케요리(武藤資賴)[* 원래는 헤이케의 [[다이라노 토모모리]]를 섬겼던 무장인데 이치노타니 전투 이후에 겐지에 투항했다.]가 다자이쇼니를 지냈다는 데서 유래한 것. 가마쿠라 막부 타도 이후 [[고다이고 덴노]]의 황자였던 가네요시 친왕(懷良親王)이 정서장군으로써 다자이후에 파견되었고, 이곳에서 기쿠치 씨에게 옹립되어 남조를 지지하며 북조에 맞섰다가 1359년에 지쿠고 강 전투에서 쇼니 씨가 이끄는 북조측 군사에 패해 다자이후가 쇼니 씨에게 넘어갔다. [[무로마치 막부]]에서는 이마가와 사다요(今川貞世)[* 고려 말의 [[정몽주]]가 [[왜구]] 근절을 요청하기 위해 직접 일본으로 와서 만났던 사람이기도 하다. 현재 다자이후 시에 남아있는 간제온지(觀世音寺) 절이 바로 당시 일본으로 건너온 정몽주가 처소로써 머물렀던 곳으로, 정몽주 본인이 간제온지의 경치를 두고 읊었던 한시도 남아 있다.]를 보내 규슈 단다이(九州探題)로써 다자이후를 지배하게 했다. 이마가와 사다요는 다자이후의 지배권을 놓고 쇼니씨와 대립하여 쇼니 후유스케(少弐冬資)를 죽이고 다자이후와 그 소재지인 지쿠젠 국을 규슈 단다이의 직할지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마가와 사다요가 규슈 단다이에서 해임되고, 후임 규슈 단다이인 시부카와씨가 쇼니 씨의 역공을 받으면서 다자이후는 규슈 단다이와 쇼니씨의 분쟁지역이 되었다. 얼마 못 가, [[오우치]] 씨가 규슈 단다이를 후원한다는 명목으로 이 지역을 집어삼키고, 이어지는 쇼니씨의 저항을 오랜 세월에 걸쳐 분쇄하면서 [[센고쿠 시대]]에는 오우치 씨의 영지로 굳어졌다. 오우치씨의 실질적 마지막 영수인 [[오우치 요시타카]]는 쇼니씨를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쇼니의 상급 관직이었으나 오랜 기간 유명무실했던 다른 다자이후의 차관직 다이니(大弐)를 '''황금 2천 냥'''이라는 거금을 주고 구매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