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단국대학교/역사 (문단 편집) ===== 만주에서 독립운동 자금 마련 위한 사업 ===== 국내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전개한 것과 더불어, 장형 선생은 자신이 직접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한 사업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만주지역에서 이루어졌다. 단둥에서 미곡상을 경영한 것, 길림에서 선만토지개간주식회사(鮮滿土地開墾株式會社)를 설립한 것과 정미소를 운영한 것이 바로 그러한 활동이었다. 장형 선생은 단둥에서 미곡상을 차렸다. 단둥은 장형 선생이 만주로 망명한 이래 활동하던 거점이었다. 단둥에서 20여 리 떨어진 오룡배에는 동생 장세원 가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장형 선생이 단둥에서 미곡상을 경영하였다는 사실은 1938년 일제 경찰에 피체되어 재판을 받은 재판기록에 나타나 있다. 이에 의하면 단둥시내에 8,500원의 자금을 가지고 미곡상을 차렸다는 것과 미곡상은 조카 김제현이 맡고 있었다고 한다. 장형 선생 자신이 미곡상과 관련하여 남긴 이야기도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아니지만, 해방 후 지인들에게 자신의 활동을 언급한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해진다. > 내가 중국 땅에서 독립운동 할 때 창고에 쌀을 가득히 쌓아 놓고, 그 쌀을 중국인들에게 팔아서 그 돈을 가지고 소만(蘇滿)국경에 가서 무기를 구입하는 일을 전담하던 때가 있었는데 > -------- > - 범정·혜당기념사업회, 『범정언행록』, 단국인회, 1996, 136쪽. 위의 언급에서 두 가지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첫째는 중국인들에게 쌀을 팔아서 자금을 마련하였다는 것이고, 둘째는 마련한 자금을 가지고 소만 국경에 가서 무기를 구입하였다는 사실이다. "차옥에 가득히 쌓아놓고, 중국인들에게 쌀을 팔았다"는 것은 미곡상을 경영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미곡상을 통해 자금을 마련한 것뿐만 아니라, 장형 선생은 무기를 구입하는 일도 담당하고 있었다. 만주지역에서 수많은 독립군 부대들이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었지만, 독립군들이 무기를 직접 생산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독립군들은 대부분 무기를 구입하여 사용하였다. 무기 구입은 러시아 지역에 파견되었던 체코슬로바키아 군인들을 통해 이루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오스트리아에 징발당하였던 체코의 군인들이 돌아가게 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조국이 옷트리아의 식민지로 고통 받았던 관계로 한국에 대해 동정적이었으며, 독립군의 요청에 의해 비교적 헐값으로 다량의 무기를 넘겨주었다. 장형 선생도 이때 소만 국경에 가서 무기를 구입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장형 선생이 길림에서 선만토지개간주식회사를 설립한 것도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자신이 필사해 놓은 이력서에 의하면, 장형 선생은 1927년 8월부터 1933년 2월까지 선만토지개간주식회사 사정에 피선되어 활동하였다고 한다. 당시 길림은 정의부(正義府)의 관할지역이었고, 정의부에서는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토지를 조차하여 수전을 개발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업을 위해 설립한 것이 선만토지개간주식회사였고, 장형 선생이 그 사장을 맡았던 것이다. 장형 선생은 길림에서 정미소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정미소는 길림성 반석현 연통산진이란 곳에 차렸다. 연통산진은 길림시에서 남서쪽으로 약 100㎞ 정도 거리에 있는 곳으로, 낮은 구릉지대의 넓은 벌판에 펼쳐져 있어 수전에 적합한 곳이다. 만주로 이주한 많은 한인들이 이곳에 정착하여 벼농사를 지었고, 독립운동의 주요한 근거지가 되었다. 특히 일제가 만주를 침략한 후 한국인 이홍광이 일명 '개잡이부대'로 알려진 타구대를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중국인 양정우 등과 함께 [[동북항일연군|동북인민혁명군]]을 조직하여 일본군과 치열한 항전을 전개하였던 곳이다.[* 반석현지편찬위원회, 『반석현지』, 길림인민출판사, 1999, 263~264쪽.] 장형 선생이 연통산진에 정미소를 설립 운영한 것은 최근의 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장충식]] 이사장의 "아버지가 길림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정미소를 운영하였는데, 이 사실을 알고 일본군 수비대가 와서 정미소를 불태웠다"는 증언을 토대로, 2011년 6월 현지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연통산진에 있는 정미소 터와 일본군수비대 건물을 확인한 것이다. 정미소 건물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다. 정미소는 부인 한씨 명의로 되어 있었다. 일본군 수비대는 정미소 1㎞ 정도 떨어진 곳에 있고, 현재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