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단국대학교/역사 (문단 편집) ==== 제2절 [[백범 김구]]와 건국실천원양성소 운영 ==== || [[파일:장형선생과단국대학의설립을축하하러온김구선생.jpg|width=100%]] || || {{{#ffffff '''대학설립을 격려하는 김구 선생과 장형 선생(앞줄)'''}}} || 범정은 임시정부가 추진한 대학 설립에 참여하여 [[국민대학교|국민대학]]을 설립한 것과 더불어 백범 김구와 함께 건국실천원양성소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잘 알려져 있듯이 백범 김구(이하 백범으로 약칭)는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다. 백범이 환국한 후 개인적으로 추진한 일이 하나 있었다. 독립국가 건설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고, 이를 위해 건국실천원양성소를 설립한 것이다. 백범이 설립한 건국실천원양성소 운영에 범정이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건국실천원양성소는 독립국가 건설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임시 교육기관이었다. 교육기관은 1개월이었고, 매기마다 1백여 명의 입소생을 모집하여 교육시켰다. 입소생들은 20세부터 45세까지 중등교육을 받은 성인 남녀들을 대상으로 하였고, 한국독립당·대동청년당·대한청년당 등 애국단체에서 추천을 받아야 입소할 수 있었다. 1947년 5월 제1기생이 수료한 이래 1949년 12월 해체될 때까지 모두 9기생이 수료하였다. 범정은 이러한 건국실천원양성소 운영에 깊게 관여하고 있었다. 이사장을 맡은 것이다. 건국실천원양성소와 관련된 자료들이 별로 남아 있지 않지만, 1948년 11월 1일부터 시작되어 12월 19일에 수료한 제5기 수업생 명부가 남아 있다.[* 「건국실천원양성소」 제5기수업생명부(백범김구기념관 소장 자료)] 여기에 소장 김구, 그리고 범정이 이사장으로 되어 있다. 건국실천원양성소 운영에는 적지 않은 재정이 필요하였다. 입소생들은 합숙을 원칙으로 하였고, 100여 명에 달하는 입소생들의 숙식비를 감당해야 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백범이 소장으로 있는 건국실천원양성소에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인사도 없었다. 백범이 재정적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이사장직을 만들고, 범정에게 이사장을 맡도록 제의하였다. 당시 범정은 단국대학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던 때였다. 범정은 백범의 제의를 받아들였고, 건국실천원양성소 이사장을 맡았다. 그리고 운영에 소요되는 재정을 지원하였다. 범정은 해방 후 국내에 들어와 백범과 각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문헌자료로 남아 있는 것은 없지만, 증언이나 사진을 통해 이들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장충식 이사장의 증언에 의하면, 범정은 편지를 통해 백범과 수시로 연락을 하고 있었다고 하며, 자신이 편지를 전달하는 심부름을 맡았다고 한다. 그리고 1948년 1월 18일 백범이 내수동에 있는 범정의 집을 직접 방문한 일이 있었고, 이때 범정·장도빈·엄항섭·박정숙·김정실·양주동 등과 함께 찍은 사진이 남아 있다. 범정은 해방 후 국내에 들어와 백범과 각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문헌자료로 남아 있는 것은 없지만, 증언이나 사진을 통해 이들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장충식 이사장의 증언에 의하면, 범정은 편지를 통해 백범과 수시로 연락을 하고 있었다고 하며, 자신이 편지를 전달하는 심부름을 맡았다고 한다. 그리고 1948년 1월 18일 백범이 내수동에 있는 범정의 집을 직접 방문한 일이 있었고, 이때 범정·장도빈·엄항섭·박정숙·김정실·양주동 등과 함께 찍은 사진이 남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