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단국대학교/역사 (문단 편집) ==== 제2절 혜당 조희재와 대학설립준비위원회 ==== || [[파일: 혜당조희재.jpg|width=50%]] || || {{{#ffffff '''단국대학교 설립자 혜당 조희재 여사'''}}} || 범정은 국민대학과 결별한 후, 독자적으로 대학 설립을 추진하였다. 국민대학은 임시정부가 세운 대학이지만, 신익희가 임시정부를 '배신'함으로써 그 정신을 이어가기가 어렵고, 또 임시정부가 세운 대학이라는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범정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정신을 계승할 수 있는 대학의 설립을 추진하였다.'[* 이 때문에 국민대학교는 '임시정부가 세운 대학' 이라고 홍보하며, 단국대학교는 '임시정부를 계승한 대학'이라고 홍보한다.] 범정은 대학 설립 문제를 조희재 여사와 협의하였다. 조희재 여사는 범정의 독립운동 동지였던 박기홍의 미망인이었다. 박기홍은 대한제국의 관리로 삼화(三和)와 한성우체사 등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고[* 박기홍은 1899년 12월 30일 삼화우체사 주사, 1902년 7월 28일 한성우체사 주사로 임명된 기록이 있다.],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대한제국 시기에 설립되었던 장훈보통학교가 경영난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자 1935년에 이를 인수하여 교주로서 학교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범정과 박기홍은 사적으로 사돈 간이기도 하였다. 박기홍의 딸인 박정숙이 범정의 누이 아들인 이성섭과 결혼한 것이다. 동지이자 사돈간이었던 박기홍은 범정의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범정이 국내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할 때, 그를 도운 것이 박기홍이었다. 박기홍은 국내의 거점 및 연락을 담당하는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직접 많은 자금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박기홍은 애석하게도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44년 10월 27일 별세하고 말았다.[* 박기홍의 별세에 대해서는 『매일신보』 1944년 10월 29일자에 "경성부 소재 장훈학교 설립자인 박기홍이 노환으로 별세하다"로 보도되었다.] 박기홍에게는 부인 조희재 여사[* 조희재 여사는 1892년생으로서 아호가 혜당(惠堂)이며, 풍양 조씨의 후예로서 박기홍과 결혼했다.]와 외동딸인 박정숙이 있었다. 박기홍은 별세할 때 부인 조희재 여사에게 장훈학교처럼 학교를 세우라고 부탁하며, 그 문제는 범정과 의논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범정이 대학 설립 문제를 제안하자, 조희재 여사는 이에 적극 찬동하였다. 그리고 조희재 여사는 딸 박정숙과 함께 소유하고 있던 1억원에 해당하는 토지를 대학 설립 기금으로 내놓았다[* 혜당과 딸 박정숙이 대학 설립기금을 희사하였다는 것은 1947년 11월 2일자 『경향신문』과 『한성일보』에 "시내 돈암동 471의 47에 거주하는 혜당은 딸 박정숙씨와 더불어 고인이 된 남편의 유지를 계승하고 실천하고저 시가 1억원의 토지[* 토지 80여만 평]를 희사하여 단국대하을 설립하게 되었다는데 …(후략)"라는 내용으로 보도되었다.]. 이것이 범정으로 하여금 독자적인 대학 설립을 추진하게 만든 근거가 되었다. 혜당 조희재 여사와 그의 딸 박정숙이 기부한 재산이 대학 설립에 주요한 자산이 되었다. 이와 더불어 범정에게도 적지 않은 재산이 있었다. 부친 장창익이 서울에서 한의사로 활동하며 모아 둔 재산이 적지 않았다. 범정도 충청북도 제천의 산판을 비롯하여 부친이 가지고 있던 재산들을 매각하여 보탰다. 이로써 대학 설립을 위한 기본자산이 마련되었다. 기본자산이 마련되자, 범정은 대학 설립에 박차를 가하였다. 먼저 김정실과 이석하로 하여금 대학설립 준비에 착수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김정실은 일제강점기 동아일보 기자 출신으로 국민대학 교무처장으로 있으면서 범정을 적극 도왔던 인물이고, 이석하는 강원도의 거부였던 고중권의 재산관리인으로 범정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하였던 인물이다. 그리고 제자인 강재훈과 신주현으로 하여금 실무를 보조하게 하였다. 범정은 대학설립을 추진하면서 여러 인사들을 만났다. 백범을 비롯하여 보성전문학교 시절부터 친구이자 민족주의 사학자인 장도빈, 민족주의 사학자이면서 조선일보 주필과 사장을 지낸 언론인 [[안재홍]], 대종교의 [[안호상]] 등 여러 분야의 인사들이었다. 범정은 이들에게 국민대학과 결별한 이유와 별도로 대학을 설립하고자 하는 취지를 설명하고, 대학 설립에 관한 이유를 구하였다. 이 과정에서 학교 이름이 '단국'으로 결정되었다. 범정은 이들에게 교명에 대한 의견을 구하면서 "지금 임시정부와 백범이 나서서 남북통일과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하고 있는데, 학교의 이름은 남북통일에 기여하고 그것을 상징하는 의미를 담았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이에 대해 안호상, 안재홍, 장도빈 등은 '통일국가를 수립하려면 민족의 동질성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 아니냐. 남북을 막론하고 단군의 건국정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에 따라 남북통일과 통일정부수립을 위해서는 단국의 건국정신을 고취해야 한다는 뜻에서 교명을 ''''단국''''으로 결정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