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단국대학교/역사 (문단 편집) ==== 제3절 단국대학의 설립과 개교 ==== 설립준비위원회가 결정되면서, 대학 설립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설립준비위원회는 낙원동에 있는 조선정치학관[* 현재 건국대 박물관, 당시 조선정치학관에는 건국대, 국민대, 단국대가 있었다.] 2층에 사무실을 마련하였다.[* 이 건물은 현재는 [[낙원동 교사]] 라고 불려진다.]조선정치학관은 한말 서북학회 회관으로 세워졌던 건물이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오성학교·보성전문학교·협성실업학교 등의 교사로 사용되다가 유석창[* 건국대학교 설립자]이 이를 인수하였고, 이곳에서 1946년 5월 조선정치학관을 설립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사무소를 마련한 설립준비위원회는 대학 설립을 추진하였다. 우선 대학 설립에 필요한 행정적인 절차를 밟았다. 설립준비위원회는 재단법인, 대학 설립, 이사장 승인 등 세 가지 서류를 작성하여 1947년 9월 15일 남조선과도정부 문교부에 제출하였다. 남조선과도정부는 미군정이 행정권을 한국인들에게 이양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적인 행정부로, 안재홍이 민정장관을 맡고 있었다. 남조선과도정부 문교부에 제출한 대학설립 신청은 한 달 보름만에 승인이 났다. 1947년 11월 1일 문교부장 유억겸의 명의로 「재단법인 단국대학 설립의 건 인가함」, 「단국대학 설립의 건 인가함」, 「이사장 이사 및 감사 취임의 건 인가함」 등 세 건의 인가서가 발급된 것이다. 이는 11월 3일 설립준비위원장 혜당에게 전달되었다. 당시 혜당은 와병 중에 병상에서 설립인가서를 직접 받아보고 크게 기뻐하였다.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홍익인간의 뜻을 따라 할 일을 다한 듯합니다. 이사장(범정)님께서 잘 맡으셔서 운영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혜당의 나이 56세였다. 혜당의 장례는 대학장으로 거행되었다. 범정은 소의(素意)대로, ‘학생독립운동의 날’에 맞춰 1947년 11월 3일에 「단국대학 설립취지서[* "재단법인 단국대학은 우리 민족의 역사적 요구와 인류의 세계적 요망에 대응하기 위하야 오천년 유구한 문화를 여기에 재흥하고 만인공영(萬人共榮)의 진리를 부흥하고 혈맥에 흘러온 전통적 우수성을 민족적으로 회복하여 우리와 세계인류의 영원한 자주적 독립과 발전번영을 기도하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의 건국정신을 여기에 광복하는 선도자와 창계자적 역할을 메고 나갈 문화사관(文化士官)을 양성하여 조선과 세계의 부흥을 위하여 동원되는 전선(全鮮)에 배속시키는 사업의 원천지가 되겠다는 자부와 자긍에서 만리붕정(萬里鵬程)에 오르는 배다. 정의(正義)는 이기고 진리(眞理)는 기리 빛날 것이다. 새 세계(世界)의 전개가 그 무대의 중심을 동방(東方)으로 전전(轉奠)하고 있으니 아득한 그 옛날 사해(四海)를 비치던 그 등대(燈臺)에 이제 봉화(烽火)는 높이 들렸다. 의(義)를 모르고 예(禮)를 상실한 옅은 지식의 무리들의 지배와 말발굽 아래서 억눌이어 그 천부(天賦)의 낙토(樂土)를 잃고, 그 문화를 짓밟히고 자유와 행복을 상실당한 채 유리전전(流離轉輾)하는 암흑의 천지(天地)가 몇 세기(世紀)를 되푸리하였는가. 우리는 하늘이 주신 인권(人權)과 그 천연(天然)의 자유를 확립하고 만인(萬人)이 갈길을 개척하여 자기로부터 세계가 한집으로의 낙원(樂園)을 건설하는 데 우리는 한 개의 횃불이 되고 진리의 전당(殿堂)이 되고 인류의 지표로의 사명을 스사로 수행하려는 것이다. 태동대륙(泰東大陸)에 아침이 열리니 이름하여 배달이라 한다. 대륙(大陸)과 대양(大洋)에 터전한 지리적 부(富)와 맥맥(脈脈)히 흐르는 피의 겨레 삼천만의 뭉치가 자기로부터 비롯하는 세계부흥(世界復興)의 성업(聖業)에 진군(進軍)될 것이다. 이 시대창조의 행진곡에 그 연주의 지휘봉은 들렸다. 우리는 우리와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힘을 아울러 우리와 우리의 후배들의 길이 그 진리를 찾고 일을 배우고 글을 닦아 진(眞)과 선(善)과 미(美)의 참된 일군이 여기에서 나고 여기에서 비롯하기를 기하여 한 개의 글집을 세우는 것이다."]」와 함께 단국대학 재단설립을 선포하였다. || [[파일: 독립신문단국대.jpg|width=100%]] || || {{{#ffffff '''임시정부가 발행하는 환국속간 '독립신문'에 실린, 단국대학교 개교 기사'''}}} || 설립준비위원회는 설립인가를 받은 후, 학생을 모집하고 개교를 준비하였다. 학제는 2개 학부(법정학부, 문리학부)에 5개 학과(법정학부: 정치학과·법학과, 문리학부: 사학과·수학과·물리학과)로 결정되었다. 결정된 학제에 의해 입학시험을 통해 학생 선발이 이루어졌다. 1947년 11월 19일과 20일 양일에 걸쳐 중앙여자고등학교에서 문교부 감독관이 입회한 가운데 입학시험을 치렀다. 이를 통해 960명의 학생을 선발하였다.[* 단국대학이 처음 선발한 입학생수는 법정학부(정치학과 240명, 법학과 240명)와 문리학부(사학과 240명, 수학과 120명, 물리학과 120명)를 합하여 960명이었다.] 정치·법률·사학·수학·물리 등 5개 학과를 설치한 데에는 범정의 역사의식이 반영되었다. 정치와 법률은 국제정세와 국제법에 어두워 남의 나라 식민지가 되었다는 자각에서, 수학과 물리는 기초과학이 국가발전의 토대가 된다는 현실인식에 근거한 것이었다. 4개 학과와 더불어 인문과목으로 유일하게 설치한 학과는 사학과였다. 범정은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남북통일에 기여하여야 한다는 역사의식을 실천하기 위해 사학과를 설치하였다. 장도빈을 초대 학장에 임명한 것도 그러한 의도였다. 장도빈은 보성전문학교 시절부터 친구이기도 하였지만,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권업신문』을 발간하며 독립운동 일선에서 활동하였던 독립운동가였고, 『조선역사대전』, 『대한역사』 등을 저술한 대표적인 민족주의 사학자였던 인물이다. 1947년 11월 30일 초대 학장에 장도빈이 취임하면서 학교의 기구도 갖추어졌다. 학교의 기구는 이사장 장형, 교주 박정숙, 학장 장도빈 등으로 구성되었다. 1947년 12월 3일 제 1회 입학식을 거행하였다. 입학식은 휘문중학 강당에서 오전 10시에 개최되었다. 입학식에는 교수와 학생, 그리고 문교부 차장 오천석과 미군정장관 딘(William F. Dean) 소장[* 당시 딘 소장은 축사에서 "단국대학은 한 여성(혜당 조희재 여사)의 힘으로 창립된 세계유일의 대학"이라고 찬사했다.]을 비롯하여 1천여 명이 참가하였다. 단국대학은 문교부로부터 설립인가를 받은 정규 4년제 대학이었고, 설립 당시 남한의 20개 대학[* 1. 국립 서울대학교 2. 연희대학교 3. 고려대학교 4. 이화대학교 5. 성균관대학 6. 동국대학 7. 세브란스의과대학(연희대학과 통합 후 현 연세대학교) 8. 중앙여자대학(현 중앙대학교) 9. 경성성신대학(현 가톨릭대학교) 10. 국학대학(우석대학에 통합 후 우석대학은 다시 고려대와 통합됐다) 11. 청주상과대학(현 청주대학교) 12. 대구의과대학 13. 대구농과대학 14. 대구사범대학, 15. 대구대학(대구농과대, 대구사범대, 대구대와 통합 해 현 국립 경북대학교) 16. 국립부산대학 17. 광주의과대학(현 국립 전남대학교) 18. 춘천농과대학(현 국립 강원대학교) 19. 이리농과대학(현 국립 전북대학교) 20. 단국대학]의 하나였다. 1947년 12월 15일 남조선과도정부 문교부에서 20개 정규대학을 발표하였는데, 그 안에 단국대학이 포함되었다. 해방 후 어수선한 정국에서 학원모리배들이 속출하고 있었다. 학원모리배는 학생들을 모집하여 이득을 취하려는 학원과 인사들을 말한다. 문교부에서는 이러한 학원모리배들로 인해 교육건설에 많은 지장이 있다며, 유령학원의 학생모집에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하여 정규 20개 대학을 발표한 것이다. 따라서 '''단국대학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에 의해 설립된, 광복 후 최초의 4년제 정규 대학으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정신이 반영된 대학이란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