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단국대학교/역사 (문단 편집) ===== 군사정부의 '대학정비'와 1부(주간) 폐지 ===== 우리 대학은 5·16 군사정부의 일방적이며 강압적인 교육정책으로 대학 설립 이래 가장 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군사정부에 의한 1부의 폐지였다. 1961년 5·16군사정변 직후 취임한 제10대 문희석 문교부장관은 같은 해 6월 21일 기자회견을 갖고 대학정비방침을 표명하였다. 이어 문교부는 7월 22일 제1차 대학정비안을 발표하고,8월 16일 제2차 대학정비안을 내놓았다. 1961년 9월 7일 문교부는 각 대학의 실태상황을 보고하도록 지시하였다. 그 공문에는 “추신: 본건 보고서는 종전에 문교부에 보고 한 것과는 관계없이 사실대로 보고하여 주심을 바람”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문교 제4916호). 이에 대하여 각 대학은 실태상황을 보고하였다. 이것은 문교부가 대학정비를 위한 기본 자료로써 수집한 것이 었다. 드디어 1961년 11월 18일 문교부는 사립대학 정비기준을 발표하며 대학정비를 본격적으로 결행하였다. 대학정비는 전국의 대학생 총수를 7만 명으로 책정하고 실시된 것이었다. 7만 명이라는 총수는 4년제 국공립대학(주간) 2만 명, 4년제 사립대학(주간) 3만 5천 명, 초급대 1만 명, 야간대 5천 명으로 산출한 숫자였다. 대학정비 결과 교수정년이 60세로 낮아지고 그 대신 명예교수제를 시행하였다. 대학의 경우에는 대학설치 기준령에 교수 1명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1부(주간)의 폐쇄,2부(야간)로만 존속시킨다는 내용을 발표하였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 내용을 제11대 김상협 문교부장관 명의로「대학 재정비」라는 제목하에 공문으로 1962년 2월 9일 대학에 보내왔다. 단국대학에 책정된 2부대학 680명 정원은 대학정비 기준으로 보면 야간대학 5만 명 가운데 드는 것이 었다. 결국 개교 16년을 굳건히 지켜온 우리 대학은 문교당국의 공문 한 장으로 1부 대학의 전통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근로학생을 위한 한 개의 2부대학으로만 그 존속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실로「대학재정비」의 공문이 우리 대학에 던져준 충격은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단국대학은 조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되고 사상적 혼란으로 국가의 안위를 근심치 않을 수 없었던 시기에 거시적 안목으로 민족의 내일을 통찰하고 사학설립의 중대성을 인식하여 1947년에 설립되었다. 그 사이 수많은 난관을 겪으면서도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약 5천 명의 졸업생을 사회에 배출하였으며, 교육 시설도 설립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충실해졌고, 기본재산도 우리나라 사립대학 중에서는 수위를 차지할 만큼 확충되었다. 더구나 그동안 외적 변동으로 말미암아 치른 수많은 진통을 무난히 극복하고 양적·질적 발전을 꾸준히 이루어 온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군사정부의 급진적인 문교정책은 그동안 장족의 발전을 이룩해 온 단국대학을 일대 암영 속으로 밀어 넣었다. 결과적으로 단국대학은 개교 16년 이래의 최대 위축기를 맞이하였다. 교육면에서, 경영면에서, 그리고 학생·교직원의 의욕면에서 일대 위기가 닥쳐온 것이다. 1962년 3월 12일 문교부는 각 대학에 공문을 띄워 폐지되는 대학 및 학과의 재학생에 대한 전과 및 전·편·입학을 같은 해 4월 10일까지 완료하도록 시달하였다. 이때 폐지된 1부에 재학 중이던 학생과 교원 수는 학생 총 816명에 교원 38명이었다. 그러나 단국대학은 문교부 당국의 전•편입 시달에도 불구하고 적자경영을 무릅쓴 채 폐지된 1부의 잔류생을 위한 정상수업을 지속하였다. 그 이유는 대학에서 1년 이상 학습한 학생이 타교로 전출함으로써 입게 될 교과과정의 불연속 등에서 일어나는 수업상의 피해, 대학의 광범한 장학제도와 저렴한 등록금 혜택을 받아온 학생들이 타교로 전출함으로써 입게 될 경제적 피해 등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또 단국대학에서 창학 이래의 주류를 이루어 온 1부의 전통을 결코 쉽사리 버릴 수 없었고, 이것이 1부 부활의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한 가닥 희망을 가졌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대학은 대학설치기준령에 의한 대학정비작업에서 1부 폐쇄조치를 당하여 가장 암담한 시기에 들어섰 다. 1962년도에는 1부의 폐쇄로 인해 순전한 2부의 신입생 모집만이 있었는데, 그 결과는 매우 저조하였다. 3차 모집에도 불구하고 상학과와 화공학과를 제외한 다른 학과는 정원에 미달하였다. 이렇듯 1962년도에 단국대학은 정원미달의 2부를 이끌고 간신히 명맥을 잇게 되었으므로 지난날의 성대하였던 모습이 오히려 무색하게 되어 버렸다. 이 무렵 비록 제도적으로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1962년 2월 19일에 2부 대학의 한남동 이전으로 오랫동안 정들었던 신당동 교사에서 한남동 교사로의 이전을 완료하게 되었다. 한편 대학정비에 따라 2부는 종전의 6개 학과에서 8개 학과로 증설되었다. 이전한 2부대학은 한남동 교사의 법정학관을 사용하였고, 사무실은 동 학관의 2층에 자리하였다. 이로써 우리 대학은 대학 초기의 희비 얽힌 신당동 교사에서 완전 철수함으로써 옛 교사를 폐쇄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