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단국대학교/역사 (문단 편집) ==== 제1절 독립운동 참여 동기 ==== || [[파일: 범정장형.jpg|width=60%]] || || {{{#ffffff '''단국대학교 설립자 범정 장형 선생'''}}} || [[장형(독립운동가)|장형]] 선생은 [[평안북도]] [[용천]]에서 1899년 1월 18일에 유명한 한의사인 장창익(長昌翼)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인동 장씨|인동]](仁同)이다. 본명이 장세담(長世淡)이었는데,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하면서 장형이란 이름을 사용하였다. 호는 범정(梵亭)이다. 장세담이 태어난 용천은 압록강 하류에 있는 지역이다. 중국과 가까운 곳으로,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면서 러시아와 일본 군대의 격전지였는데 15세의 장세담도 이 전쟁을 겪었다. 러일전쟁으로 용천 지역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이로 인해 용천 지역민들은 다른 어느 곳보다도 외세의 침략에 대해 경각심을 갖게 되었다. 독립운동가들 중에 유달리 용천 출신들이 많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의병장으로 서간도에서 대한 독립단을 조직하여 활동한 [[전덕원]], 중국군에서 사단장으로 항일전을 전개하고 한국광복군에서 참모장으로 활동한 [[김홍일(군인)|김홍일]] 장군,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송병조]], 기독교계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함석헌]] 등이 모두 용천 출신이었다. 청년 장세담이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도 이러한 지역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고향에서 동명중학교를 졸업한 장세담은 1908년 4월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하였다. 보성전문학교는 [[고종황제]]의 측근이었던 [[이용익]]이 설립한 것으로, 배일적 색채가 강한 학교였다. 보성전문학교에 다니면서 [[장도빈]]을 만나 친구가 되었고, 그와 함께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섰다. 장도빈은 훗날 단국대학 초대학장이 되었다. 장세담이 보성전문학교를 다닐 때,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였고, 1907년에는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군대마저 해산시켰다. 이어 1909년에는 소위 기유각서를 통해 사법권마저 장악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렇게 나라를 잃어가는 참단한 현실에 학생들은 대부분 구국의 길을 찾아야 한다며 학업을 그만두었다. 이에 장세담도 학업을 중단하고 [[신민회]]에 가담하였다. 신민회는 1907년 4월 [[안창호]]·[[양기탁]]·[[유동열]]·[[이동녕]]·[[전덕기]]·[[이회영]]·[[김구]] 등의 인사들이 설립한 구국운동 단체로, 비밀리에 조직을 유지하며 활동하고 있었다. 친구 장도빈은 대한매일신보사의 기자로 사장 양기탁을 도왔고, 장세담은 비밀회원으로 신민회의 운동자금을 마련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러한 임무를 맡게 된 것은 부친이 한의사로 많은 돈을 벌었던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장세담의 부친 장창익은 유명한 한의사였다. [[사상의학]](四象醫學)에 뛰어났으며, 특히 진맥을 잘 보았다고 한다. 명성이 각지로 퍼져 나갔고, 장창익은 거처를 용천에서 서울로 옮겼다. 서울에서 진료하며 많은 돈을 벌었다. 내수동에 집도 마련하였고, 충청북도 제천 등지에 산도 사두었다. 훗날 장세담이 국내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할 때 한의사로 행세한 것, 해방 후 서울에 자리를 잡은 것, 그리고 단국대학을 설립할 수 있었던 것 등은 이러한 부친의 영향이 컸다고 하겠다. 장세담은 [[손병희]]도 만났다. 설립자 이용익이 일본으로 끌려간 후 보성전문학교가 운영난에 빠지게 되자 학생들과 함께 천도교 대표인 손병희를 찾아갔다. 그에게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도록 요청하였다. 손병희는 이들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1910년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였다. 손병희와의 만남을 통해 크게 가르침을 받은 것이 있었다.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금이 필요하다는 것과 자금조달 방법에 대한 것이었다. 1910년 8월에 대한제국이 망하자, 장세담은 신민회와 함께 활동하였다. 신민회 간부들은 양기탁의 집에 모여 국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양성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대상지는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였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1910년 12월 이회영·[[이시영(정치인)|이시영]] 등 6형제가 전가족과 함께 먼저 떠났고, 이동녕·[[이상룡]]·[[김동삼]] 등 신민회의 주요 간부들도 연이어 이주하였다. 1911년 2월 장세담도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