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단국대학교/역사 (문단 편집) ===== '신념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 해방 후 고난을 이겨내면서도 단국대학은 오직 민족자본에 의하여 꾸준히 발전해 왔다. 그러나 다른 대학은 학생을 증원하면서 종합대학교로 발전했는데 단국대학은 단과대학이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여러 가지 교내외적인 여건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장으로 취임한 직후, 중재 장충식은 재학생들은 물론 졸업생들에게까지 전 단국인이 열망하는 종합대학교로의 승격 추진을 결심하였다. 장충식 학장은 신념이 있는 곳에 길이 열릴 것이라는 소신을 바탕으로 종합대학교 승격을 위해서 각 방면에서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종합대학교 승격안이 진행되기에는 당시 교내에 여러 가지 여건이 성숙되지 않아서 애로가 많았다. 첫째, 30대의 젊은 학장이었기 때문에 과연 이 사업을 성공시킬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학내인들의 의구심이 많았다. 둘째, 이사진의 협조를 얻을 수 없었다. 그들의 소극적 태도는 종합대학교가 될 수 있는 제반 시설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는 이유로 들어 협조하지 않았다. 셋째, 문교당국의 불신도 한몫 하였다. 그들도 역시 단국대학이 종합대학교로서의 여건이 구비되지 않았다고 본 것이다. 그는 취임 며칠 후인 11월 3일 강순원 이사를 만나 종합대학교 추진을 위한 이사회의 승인을 요청하였다. 이에 박정숙 이사장이 주재하는 간담회 형식의 이사회가 열렸고, 장 학장의 열의에 감복한 이사장은 흔쾌히 종합대학교 승격 추진사업을 승낙하였다. 일단 이사회의 승인을 얻은 장충식 학장은 문교부장관([[문홍주]])을 만나 이 뜻을 전하면서 승격에 따른 제반 서류 작성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장관은 이러한 장 학장의 뜻을 한 마디로 거절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그 해 종합대학교 승격한 [[우석대학교(서울)|우석대학]][* 1966년~1971년까지 종합사립대학교로 존속되다가 경영난으로 고려대학교에 합병됨.] 문제가 있고, 둘째는 대구대학의 종합대학교 승격을 거부하였다는 이유였다. 전자는 우석대학과 함께 서울에서 두 대학씩이나 종합대학교로 승격시킬 수 없다는 것이며, 후자는 대구대학이 모 국회의원을 통해 오랫동안 승격을 추진하여 왔으나 결국 거절하였다. 이런 분위기가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단국대학을 승격시켜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장충식 학장은 이에 대하여 "여건이 갖추어지면 두 대학이 아니라 더 많은 대학이라도 승격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같은 장 학장의 강경한 자세에 장관은 "그러면 다른 단과대학을 하나 흡수 통합하면 고려하겠다"는 대안을 내어 놓았다. 이번에는 장 학장이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논의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렇듯 종합대학교안이 벽에 부딪치자 장 학장은 이사진과 의논하고 마침내 청와대에 청원하기로 결심하였다. 장 학장은 당시 대통령 비서관이었던 권상하를 만나러 청와대로 갔다. 장 학장은 권 비서관에게 준비해 간 종합대학교에 필요한 자료를 제시하며 우리 대학이 종합대학교가 되어야 할 여러 가지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권 비서관은 대화 내용을 옆에 있는 속기사에게 기록시켰다. 당시 기록된 대화를 살펴보면, 장 학장은 "우리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는 광활한 터전을 마련하겠다는데 항상 다 같은 대학이면서도 차별적인 대우를 받는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라고 개탄하였던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권 비서관과의 면담으로 장 학장의 청원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알려졌고, 대통령은 즉시 문교부장관과 국회 문공위원장이었던 [[이돈해]] 의원을 불러 "조건만 갖추어지면 단국대학교도 종합대학교로 승격시켜 주어야 한다"고 직접 지시하였다. 이에 거절하던 문교부장관이 장 학장을 직접 찾게 되었고, 승격에 대한 사무적인 절차도 순조롭게 진행되어 차관회의에서 통과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국무회의에서 이 안건과 관련이 없던 '모' 장관의 반대에 다시 부딪쳐 버렸다. 이 모 장관을 설득하기 위하여 장 학장이 직접 찾아가도 그는 면회조차 해주지 않았고, 그 사이 승격안은 국무회의에서 2차례나 보류되었다. 만약 3차에서도 보류되면 아예 이 안은 폐기되고, 이제까지 젊은 혈기와 신념으로 동분서주하였던 장 학장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는 상황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즈음에는 이미 각 대학의 정원이 조정되었을 때이며 시기적으로도 사실상 늦은 시점이었다. 때문에 장 학장은 3차 국무회의만은 넘기지 말아야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급한 마음에 국무총리였던 정일권을 찾아가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결과는 다행히 채택되었는데 흥미로운 사실은 그해 마지막 국무회의가 열렸던 12월 30일의 안건이 단국대학에 대한 단독안건뿐이었다고 한다. 당시 그렇게 반대하던 모 장관은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해당부서 차관이 대신 참석하여 모 장관과 짠 듯 일관되게 이 문제를 반대하였다. 이 때 무임소장관으로 있던 [[김원태(1909)|김원태]]가 "자기 소관도 아닌데 차관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일침을 놓고 마침내 각의서를 통과시켰다. 한편, 모 장관이 그렇게 단국대학의 승격을 반대한 이유는 알고 보면 좀 황당하였다. 그가 모 대학의 증과·증원을 문교부장관에게 부탁하였다가 거부되자 장관에 대한 불만 표출을 엉뚱하게도 단국대학의 종합대학교 승격 문제에 연결시켜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는 소문이 있었다. || [[파일: 종합대학 승격 기념 현판식.jpg|width=100%]] || || {{{#ffffff '''종합대학 승격 기념 현판식(1967)'''}}}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