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단국대학교/역사 (문단 편집) ===== 교육 및 연구 관련 건물의 신축 ===== 종합대학교로 승격되기 이전의 중요 건물은 본부·문학관·이공학관·법정학관·도서관의 다섯개뿐이어서 종합대학교 규모로서는 많이 부족했다. 이처럼 빈약한 교육시설의 확충을 위하여 박정숙 이사장을 비롯한 여러 이사들과 장충식 총장은 비장한 각오로 시설확충 계획을 세우고 건설을 촉진해 나갔다. 이러한 의욕적인 건설의 추진은 종합대학교가 되고 난 지 몇 년 사이에 학교의 면모를 확연히 바꾸어 놓았다. 첫째, 28개 학과 가운데 유일하게 여학생만 모집하는 학과가 가정학과였다. 따라서 종합대학교 승격과 더불어 여학생을 위한 가정학관의 착공을 서두르게 되었다. 1967년 7월 11월에 착공하여 그 해 12월 27일에 준공을 보게 되었고 내부 시설을 갖추어 1968년 3월부터 개관하였다. 둘째, 1970년 9월 28일 종래의 '동양문제연구소'가 발전적으로 해체되고 다시 개편 발족된 '동양학연구소'는 1971년 국어국문학계에 원로학자인 일석 이희승 박사를 제2대 소장으로 초빙했다. 학계에 굴지의 업적을 쌓은 원로학자를 초빙하면서 연구를 제대로 추진할 수 있는 연구소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그에 따르는 시설이 필수적이었다. 이에 학교 당국에서는 1975년 6월 3일 중앙도서관 서편에 잇대어 8층 첨탑형의 연구소 건물을 착공하여 12월 30일에 준공 개관하였다. 동양학연구소는 3층까지 사용하고 5층 이상은 교수들의 연구실로 활용되어 일명 '교수회관'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장 총장은 이 건물을 이희승 박사의 호를 따 '일석기념관'이라 명하였다. 셋째, 공업입국이란 시대적인 요구에 의하여 각 대학에는 공대들이 신설되었는데 우리 대학교도 공과대학 인가를 받아 공학 교육을 확대하였다. 그에 따른 시설의 필요에 의해 공학대학관을 1970년 12월 10일에 완공하였다. 공과대학관의 준공에 따라 종래의 이공학관은 상경학관으로 독립하였다. 넷째, 학생의 수가 더욱 늘어나게 됨으로써 강의실 부족현상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현상을 극복하기 위하여 학교 당국은 처음 교육학부 및 단과대학에 소속되어 있던 각 교육학관을 착공하여 1973년 7월 9일에 완공하였다. 그러나 그 해 12월 28일 사범대학이 인가됨으로써 사범학관으로 개칭하였다. 다섯째, 1976년 9월 20일 개관을 보게 된 학생회관은 설립자인 혜당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혜당기념관'으로 명명하였다. 이렇게 건물에 특수한 이름을 붙여 시설의 확충을 계속하였다. 체육관은 범정을 기념하기 위하여 '범정기념관'으로 명명하였다고 민속박물관은 평생을 민속학연구에 몸 바쳐 온 석주선 교수를 기념하기 위해 '석주선기념민속박물관'으로 하였다. 석주선 교수는 동덕여대에서 복식관계의 민속자료 3천여 점을 수집하고 정리하여 이에 대한 연구에 평생을 보냈다. 정년 후 우리 대학교의 대학원 교수로 부임함과 동시에 장충식 총장의 간곡한 권유를 받아들여 이들 유물을 대학교에 기증하였다. 석 교수는 이 민속자료를 기증하면서 "오직 학문적, 역사적 자료로 후학들의 복식연구에 도움이 된다면 바랄 것이 없다"고 심정을 피력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