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단국대학교/역사 (문단 편집) === 제2장 의과대학 신설과 부속병원 설립 === 1967년 종합대학 승격 당시 문리과대학, 법정대학, 공과대학 등 3개 단과대학, 17개 학과에 모집정원은 390명이었던 대학교는 의과대학 설립을 추진할 무렵인 1988년에는 서울과 천안에 캠퍼스를 설치하여 13개 단과대학, 85개 학과에 3,950명에 이르는 매머드 대학으로 성장하였다. 종합대학 승격 20년 만에 국내 유수의 학과 편제를 가진 거대 사학으로 급성장한 것이다. 대학의 양적 체제만이 아니라 사회적 평가가 높아지면서 동문, 재학생들 사이에는 국내 사립대학의 선두에 서려면 의과대학이 필수적이라는 여론이 비등하였다. 특히 1979년 충청남도 유일의 치과대학을 개설한 데 이어 치과병원을 개원하여 성공적으로 운영되면서 의과대학 설치, 운영에 대한 대학 내적 자신감도 더해지고 있었다. 세간의 대학 평가 기준이 1960년대에는 '종합대학 인가 여부'였다면, 1990년대에는 '의과대학 부속병원 보유 여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실제로 의과대학은 '전국 최고의 인재'들이 경합하는 선망의 학과였다. 의과대학은 자연히 대학 입시의 합격선을 상승시키는 견인차였고, 의과대학 부속병원은 수익성이 높아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선입견도 있었다. 이에 따라 대학들은 서로 의과대학을 설치하고 부속병원을 세우려는 경쟁을 벌였다. 인기가 높은 만큼 진입장벽도 높았다. 의과대학 설립인가를 받으려면 문교부의 승인만이 아니라 보건사회부의 합의가 있어야 하였다. 의사는 전문직으로 공급인원을 조절해야만 의료인의 품질 저하나 과당경쟁을 막을 수 있다는 명분이었다. 장벽은 높고, 통과할 문도 좁은 탓에 결국 의과대학 설립은 '대통령의 결심'이 전제되는 막중한 사업이 되고 말았다. 팽창하는 교세와 의과대학에 대한 단국인의 열망은 [[장충식]] 총장으로 하여금 치열한 물밑 경쟁에 뛰어들도록 하였다. 의과대학 설립인가 경쟁에서 우리 대학교가 유리한 디딤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장충식 총장은 국가적 과제였던 '88 서울올림픽 준비 과정에서 중추적 사업을 맡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서울대 등 국립대 의과대학들이 예산 절감과 의사인력 수급조정 등을 이유로 정원 감축을 결정하였다. 이때 전문가들의 지지, 그리고 그동안 전력을 다해 스포츠 외교, '88 서울올림픽 준비 사업에 참여해온 점을 앞세워 장충식 총장이 정부를 설득하였다. 이 같은 정책 조정의 흐름을 타고 노력한 결과, 1987년 10월 교육부는 국립대 의과대학 정원 70명을 줄이는 대신에 단국대, 아주대, 울산대에 의과대학 신설을 인가한다는 발표를 하였다.[* 본래 의과대학은 단대에 대해서만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었으나 현대그룹의 울산대와 대우그룹의 아주대가 의과대학 인가 경쟁에 뛰어들면서 단대의 의과대학 인가는 어려워질 뻔 했다.] 1989년 1월 12일에 '단국대학교의료원 설립 및 종합건설추진위원회'를 발족하고, 서울대학교병원연구소와 공동으로 「병원건립계획 및 기본설계(안)」을 수립하였다. 설계 단계에서 김병량 교수(도시계획부동산학부)의 은사인 일본 쓰쿠바대 다니무라 히데히코 교수가 지원을 자청하고 나섰다. 이에 따라 고베예술대학의 총장이자 일본 병원건축학회 회장에 재임하고 있던 요시다케 교수가 자신의 제자들과 팀을 이뤄 부속병원 설계를 무료로 해주었다. 설계안에 따라 병원동은 지하 2층, 지상 6층, 총 6만 5,673㎡의 규모를 갖게 되었다. 병원 건물은 수직형 고층건물이라는 관행을 따르기보다는 입원동과 진료동을 구분한 저층분산식 병동을 짓기로 하였다.[* 입원실과 진료실이 같은 건물에 있으면 환자, 의료진, 방문객들의 동선이 뒤섞여 병고를 겪는 환자의 이동이 힘들어지는 불편을 막기 위해서였다.] 병원 기획단계에서 신축 사업비 규모는 약 1,100억 원 정도였다. 병원 공사비가 600억, 의료장비 구입비가 500억이었다. 그 뒤 처음 기획단계보다 병원 시설의 규모와 수준을 높여 공사비도 800억원으로 증가하여 총 1400억원이 투입되게 된 것이다. 막대한 자금이 투자되어야 하겠지만, 대학당국은 강남구 내곡동에 있는 영동캠퍼스 부지 74만 4,480㎡(22만 5,600평)를 담보로 하고자 했다. 해당 부지는 본래 그린벨트로 지정되어 개발이 불가능했지만, 그린벨트는 주택건설만 금지하고 골프장이나 체육시설 등의 설치는 가능한 땅이었다. 해서 당시 부동산업계에서는 그 가치를 600억~800억으로 추산하고 있었는데, 단국대는 이를 은행에 담보로 맡겨 병원 공사비를 조달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해당 부지는 1990년 9월 [[노태우]] 정부 하에서 국가안전기획부(현 국정원) 부지로 214억에 강매되면서 담보가 무산되고 만다. 이러한 악재와 함께 더해진 것은 노태우 정부 하에서 시행됐던 주택 200만호 건설 정책이었다. 당시 정부는 분당, 일산에 신도시를 건설해 서울 인구를 분산한다는 계획을 가졌는데 이를 위해 분당 일산에 대량의 주택 건설이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대규모 주택 건설은 건설 기자재와 인건비를 폭등시켰고, 이는 단국대학교 부속병원 착공 4개월 전의 일이었다. 결국 이러한 일 때문에 병원 공사비는 더욱 치솟았으며, 완공일도 점점 지연되고 말았다. 노태우 정부에게 내곡동 부지를 빼앗긴 단국대는 사업비를 충당할 담보 자산이 없어졌고, 제1금융권은 대출을 중단했다. 이에 자본 융통을 위해 제2금융권의 고금리 대출에 의지하면서 재정구조가 급속도로 취약해졌다.[* 단국대 부도의 역사는 여기서 출발한 셈이다.] 당시 상황을 장충식 총장은 이렇게 증언하였다. > "울며 겨자 먹기란 이런 말인가. …(중략)… 최소한 의과대학병원 건립에 필요한 경비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가치로 여겼던 땅이 없어지고 병원 건설비의 4분의 1밖에는 충당할 수가 없게 되었다. 앞길이 캄캄하였다. 우선 구 서울은행이 우리 대학교의 주거래 은행이었는데 병원 설립자금을 대출받으려면 추가 담보를 설정하라는 요구가 왔다. 담보가 어디 있단 말인가. 필요한 돈을 어음할인으로 융통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우리 대학교 재단이 빚에 시달리기 시작한 가장 큰 타격'''이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 -------- > - 장충식, 『시대를 넘어 미래를 넘다』, 543쪽. 심지어 부속병원 건설은 [[김영삼]] 정부의 특별 감사 실시로 한 때 중단되기도 하였다. 교육부의 특별감사 결과, 그동안 제2금융권을 통한 자금 조달을 시정하라는 조치를 이행하여야 하였기 때문이다. 1993년 8월 중단된 공사는 시공사인 극동건설의 호의[* 당시 창업자 [[김용산]] 회장은 500억 원 정도의 공사비를 추가로 투입해야 하는 상황에서 "공사비를 못 받더라도 우선 단대병원을 개원하도록 시공을 서둘러 마치겠다."는 각서까지 제출하면서 단국대 병원의 개원을 지원해주었다. 극동건설은 한남캠퍼스의 중앙도서관을 시공하기도 하였다.]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극동건설은 병원 설립 취지에 공감한다는 차원에서 공사를 재개하였고, 1994년 3월 31에 모든 공사를 마쳐 1994년 4월 29일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 준공 및 개원식을 가졌다.[* 개원 당시 병상 규모는 600석이다. 현재는 850석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확대되었다. 암센터가 완공되면 병상수 1000석이 넘는 대형병원으로 자리잡게 된다.] || [[파일: 의과대학 병원 준공식(1994).jpg|width=100%]] || || {{{#ffffff '''의과대학 병원 준공식(1994)'''}}}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