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단군 (문단 편집) == 상세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단군왕검 표준영정.jpg|width=100%]]}}} || || {{{#ffd400 '''단군 [[표준영정|{{{#ffd400 표준영정}}}]]'''}}} || 정확한 명칭은 '''단군왕검(檀君王儉)'''[* 한자나 역사를 잘 모르는 어린아이들은 저 왕검의 뜻을 king sword로 아는 경우가 매우 많다. 실제로는 검 자가 [[칼 검]](劍) 자가 아니다. 고조선의 후기 수도인 [[왕검성]]과 같은 [[검소할 검]](儉) 자이다.]이지만 일반적으로 단군이라고 지칭된다. 친근하게 단군 [[할아버지]]라고 불리기도 하며 [[한국]]의 [[역사]]를 열었다고 알려지는 신화 속 인물이다. 즉 한민족의 시조다. 사람마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 이른 바 단군신화의 해석은 다양하지만 적어도 근대 이래로 표면적인 이야기 자체보다는 현실적인 관점으로 문장들을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단군은 이름이며 왕명은 왕검인데 김영하 교수에 의하면 단군은 몽골 신화의 탱그리와 같은 의미이며 왕검은 일본에서 군주를 뜻하는 오오키미와 비슷한 것이다. 하지만 대종교 등에서는 여전히 단군을 왕명으로 보고 1대 단군 2대 단군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신채호를 필두로 강대한 고조선의 신앙적, 정치적인 집권군주로서 단군이 조명되고, 이에 따라 단군 신앙도 나철의 [[대종교]]로 조직화되어 민족주의적 일획을 담당했다. 이 대종교의 역사적 관점은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있으나 현대 국가 성립 초기에도 반영되어 [[개천절]]로 이어졌으나, 근대 이전까지 개천절에 대해 특별한 역사적인 근거 문헌이 있는 것은 아니고 민간 신앙을 공식화한 것에 가깝다.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이것이 한반도 북부에서 [[만주]] 일대가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로 접어들던 과도기의 역사적 믿음이 반영된 산물로 보기도 했다. [[곰]]과 [[호랑이]]를 숭배하던 [[토테미즘]]의 [[신석기]] 사회에, 천손 신앙을 가진 청동기 집단이 유입되어 그들이 호랑이 집단과 곰 집단을 흡수한 후, 훗날 [[고조선]]으로 발전하는 단군 집단을 이루었다는 정도로 해석했던 것이다. 다만 단군왕검이 최초로 문헌상에 등장하는 것은 13세기 말에 등장한 《[[삼국유사]]》이고,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문헌 《고기》(古記)는 현전하지 않는다.[* 사실 일연이 인용한 책 중에 제목이 《고기》(古記)인 서적이 있는지, 또는 그냥 옛날 기록(고기, 古記)이라는 뜻인지도 불명확하다. 다만 조선 초기까지는 고기류의 서적들이 다수 현존해있었고, 여러 서적에서도 인용되어 그 내용이 어떠한지 알수는 이다. 다만 설화적인 내용이 상당수를 차지했던 관계로 후세의 서적에 온전히 전해지지는 못했다..] 1145년에 나온 《삼국사기》에 평양의 원래 주인으로 '선인왕검(仙人王儉)'이 언급되는 것을 보아 적어도 고려 중기에는 신화의 구성이 있었던 모양이다. 다만 '선인왕검'이 '단군'으로 강력하게 추정되기는 하나 명확히 단군이라 명시된 것은 아니다. 그리고 7세기 신라의 통일 이후 단군 신앙의 중심지였을 평양은 신라와 발해의 중간지대로 관리가 되지 않아 평양성이 잡초가 무성한 폐허가 되는 등 어떤 상황이었는지조차 파악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이전 시대의 전승이 계속해서 이어졌는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삼국사기》에서 고구려 후기 기록을 중국 사서에서 빌려써서 장수왕 등의 몇몇 군주들은 내정 기록보다 [[조공]] 기록이 더 많을 정도인지라 풍습에 대한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지않을 정도라 이해가 안가는것도 아니지만. "단군"이라는 이름을 비롯하여, 신화의 전체 모습이 확인되는 것은 《삼국유사》가 쓰인 시기를 비롯한 13~14세기 이후의 일이다. 이후 조선 초기에는 황해도 구월산[* 오늘날 [[황해남도]] [[안악군]].]에 삼성사(三聖祠)가 있어 [[환인]] · [[환웅]] · 단군을 모시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 시기 단군은 민간 신앙의 중요 구성원으로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중국(명)에서 사신이 오면 의주→평양→한성(서울) 순으로 들어오는 게 순리였는데, 평양에서 지방관들의 대접을 받으며 기거할 때 반드시 이 삼성사에 들러 제례를 갖췄다고 한다. 조선 초기 영묘조(세종조)까지의 일이다.] 때문에 최근의 역사학계에서는 단군 신화를 '''대동강 유역에서 한정적으로 신봉되던 지방신'''으로 보는 견해가 점점 늘어나고 있고, 실제 청동기 시대 역사를 반영한 사실로 보는 데 소극적이다.[* 아래에서도 설명하겠지만, 단군 신화의 연대 자체가 ① 단군이 중국의 [[요(삼황오제)|요]]와 동시대의 인물 → ② 요의 역사적 존재를 사실로 인정하고 연대를 비정 → ③ 단군의 역사적 연대를 획정이라는 방식으로 정해진 것이다. 그러나 근대 이후에는 요 임금은커녕 [[하나라]]조차 사실로 인정할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실하지 않다고 보기 때문에 논리의 고리 자체가 끊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단군 신화가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중국의 역사시대에 대한 관점에 대해서는 비난하면서도 기원전 2333년이라는 연대는 철석같이 믿는 이중잣대를 들이댄다. 다만 정말로 환빠인 사람들은 대체로 삼황오제를 긍정하며 단지 한국에 유리하게 해석할 뿐이다.][* 다만 무작정 이중잣대라고 보기 어려운 것이 요임금 관련 부분은 나중에 추가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청동기 시대 혹은 고조선 시대의 구전전설이 평양 일대에서 계속 전해져 내려오다가 구체적인 연대 제시를 통한 신뢰성 상승이나 중국에 지지 않는 국가적 자긍심 고취 등의 이유로 요 임금 관련 내용이 후대에 추가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원래 구전전설이나 설화, 전설 등의 문학은 시대가 지남에 따라 살이 붙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 대종교의 아류로 만들어진 [[이유립|태백교(太白敎)·단단학회(檀檀學會)]]와 같은 종교 집단의 [[유사역사학]]은 오늘날까지도 암암리에 [[환빠|사회 저변]]에 자리하고 있어서 문제가 된다. [[유사역사학]] 추종자들은 '단군신화'라는 용어를 말하면 '''친일 식민사학자'''라고 몰아가기 일쑤지만, [[민영휘]], [[영선군]], [[박영효]], [[이재극]] 등과 친일 유림단체들도 단군을 숭배하고 [[단군릉]]수축운동을 진행했다. [[https://youtu.be/WRdWsSPnBW4|영상]] 애초에 '단군신화'는 [[주몽#탄생 설화|주몽신화]], [[박혁거세#4. 건국 신화|박혁거세신화]], [[수로왕#삼국유사 가락국기|수로왕신화]]같이 한국사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역사속에서도 흔하게 나타나는 '''건국신화'''로서 단어 그 자체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이유가 하등 없다. 그저 [[고조선]]의 건국신화 정도로 이해하면 되는 일이니 용어 사용에 대한 문제제기는 [[환빠]]들만의 주장으로 간주하고 무시하면 된다. 애초에 내용부터 현실성이 떨어지는 전설이라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한다 하더라도 신화라고 부르는게 당연한 것이다. 언론 등에서 심심하면 강조하고 싶은 내용에 '단군 이래 최대' 등의 문구로 등장하기도 한다. 곧 '유사 이래 최대'라는 말과 같은 의미. 이를 [[단군 드립]]이라 한다.[* 비슷한 사례로 [[일본]]에서는 [[일본 신화]]의 창조신 [[이자나기]]를 우려먹곤 한다. 대표적으로 일본 역사상 최고의 호황기이자, [[리즈시절]]인 [[이자나기 경기]]가 있다. 이쪽은 원래는 1950년대 전반 경제 성장으로 인한 호황을 [[진무 천황]] 이후 최대 호경기라고 해서 '진무 경기'라고 했다가, 1950년대 후반 호황이 계속 이어지자 [[아마테라스|아마테라스 오오카미]] 이후 최대라는 의미로 해당 신에 대한 신화에 등장하는 '이와토 경기'라고 한 이후, 1960년대 호경기에는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는 '이자나기 경기'라고 한 것.]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단군 드립)]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