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단군 (문단 편집) ==== 《[[제왕운기]]》(帝王韻紀) ==== * 이승휴(李承休), 1287년. >初誰開國啓風雲 / 처음 누가 나라를 열고 풍운을 시작했나? >釋帝之孫名檀君 / 제석(帝釋)의 손자로 이름은 단군(檀君)이라. > >本紀曰 "上帝桓因有庶子曰 雄. 云云. 謂曰 '下至三危太白 弘益人間歟.' 故雄受天符印三箇 率鬼三千 而降太白山頂 神檀樹下. 是謂檀雄天王也. 云云. 令孫女飮藥 成人身, 與檀樹神婚 而生男 名檀君. 據朝鮮之域爲王, 故 尸羅·高禮·南北沃沮·東北扶餘·穢與貊 皆檀君之壽也. 理一千三十八年 入阿斯達山爲神, 不死故也." >《[[삼국유사|본기(本紀)]]》에는 "상제(上帝) 환인(桓因)에게 서자(庶子)가 있어 웅(雄)이라 하였다. 운운. 이르길 '삼위태백(三危太白)으로 내려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겠습니다.'라 하므로, 웅이 [[천부인]](天符印) 3개를 받아 귀(鬼) 3,000명을 이끌고 태백산정(太白山頂)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내려왔다. 이를 단웅천왕(檀雄天王)라고 부른다. 운운. 손녀에게 약을 마시게 하여 사람의 몸으로 만들고, 단수신(檀樹神)과 더불어 혼인시켜서 남자를 낳으니 이름이 단군이다. [[고조선|조선(朝鮮)]]의 영역에 웅거하여 왕이 되었으니, 고로 [[신라|시라]](尸羅), [[고구려|고례]](高禮), [[옥저|남북옥저]](南北沃沮), [[부여|동북부여]](東北夫餘), [[예맥|예(濊)와 맥(貊)]] 모두가 단군의 후손이다. 다스린 것이 1,038년이고 아사달산(阿斯達山)으로 들어가 신(神)이 되니, 죽지 않기 때문이었다."라고 하였다. > >竝與帝高興戊辰 / 고(高: 요임금)와 함께 나란히 무진(戊辰)에 흥하여, >經虞歷夏居中宸 / 우(虞: 순임금)를 지나 하(夏)를 거쳐 대궐에 살다가 >於殷虎丁八乙未 / 은(殷) 호정(虎丁: 무정) 8년 을미(乙未)[* 기원전 1243년. 그러나 60갑자가 맞지 않으며, 이로부터 가장 가까운 을미년은 기원전 1225년이다.]에 >入阿斯達山爲神 /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이 되었네.[* 지금의 [[구월산]]이다. 일명 궁홀(弓忽)이라고 하고 또는 삼위(三危)라고 한다. [[삼성사|사당]]이 아직 있다.(今九月山也. 一名宮忽, 又名三危. 祠堂猶存.) ─ 원주] > >亨國一千二十八 / 나라를 향유함이 1,028년인데 >無奈變化傳桓因 / 어쩔 수 없이 변화하여 환인(桓因)에 전했으나 >却後一百六十四 / 도리어 164년이 지난 뒤에 >仁人聊復開君臣 / 어지신 분([[기자(중국)|기자]])[* 기원전 1049년경 책봉받음. 위에서 언급한 기원전 1243년과는 194년, 기원전 1225년과는 176년 차이가 난다.]이 군신(君臣)을 다시 열었도다.[* 다른 기록에는 이후 164년은 [[삼강오륜|비록 부자(父子)는 있었으되 군신은 없었다]]고 한다.(一作 爾後一百六十四 雖有父子無君臣.) ─ 원주] >---- >《제왕운기》 하권 《제왕운기》의 기록은 대체로 《[[삼국유사]]》와 비슷하지만 다소의 차이가 있다. 우선 환웅의 이름을 단웅으로도 기록하고 있으며, 호랑이와 곰의 설화는 없고, 단웅의 손녀[* 《[[삼국유사]]》에 나오는 [[웅녀]]와 동일한 인격체로 추정된다.]가 약을 먹어 사람으로 변한 뒤 단수신[* 《[[삼국유사]]》에 나오는 [[신단수]]가 인격화된 것으로 보인다.]과 소통하여 낳은 것이 단군으로 되어 있다. 이는 천손이 모계로 이어진 특이한 사례이다. 또한 뒤이어 [[부여]]와 [[비류|비류국]]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아 놓았다. >(전략)신(臣)이 일찍이 상국(上國)에 사자로 갔을 때 [[랴오허|요하]] 가에 있는 노변(路邊)에 무덤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곳 사람들이 '부여 [[위구태왕|부마(駙馬)대왕]]의 무덤이다'라고 하였다. 또 가탐(賈耽)[* 당나라의 정치가이자 지리학자. 정치가로서의 치적도 훌륭했지만 30년간 중국과 주변국의 자료를 모아 《해내화이도》(海內華夷圖)와 《고금군국도현사이술》(古今郡國道懸四夷述) 40권을 지었는데, 해당 문헌들은 신뢰도가 높았으나 현재는 유실되었다.]은 "큰 평원의 남쪽의 압록(鴨綠)은 모두가 부여의 옛 땅이니 북부여란 것은 마땅히 [[랴오허|요하]] 가에 있었을 것이다. 그 개국(開國)은 대개 후조선으로부터 지금에 이르렀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구삼국사|동명 본기]]》에서 적기를, "비류왕 송양이 일러 말하길 '나는 선인의 후예로 대대로 왕이 되었다. 금일 그대는 나라를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나의 부용이 되는 게 어떠하겠는가?'라고 한 것은 이 또한 단군의 후손이 아니겠는가?"(比流王松壤謂曰 予以仙人之後 累世爲王 今君造國日淺. 爲我附庸可乎 則此亦疑檀君之後也)라고 하였다. >---- >《제왕운기》[[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4&cp_code=rp0703&index_id=rp07030264&content_id=rp070302640001&search_left_menu=2|문화콘텐츠닷컴 사이트]], 김경수 역 . 여기서는 단군과 부여, 고구려를 서로 밀접하게 관련된 관계로 보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