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단군릉 (문단 편집) == 진위 여부 == 상술했듯 북한은 과거에는 단군릉 등의 고대 유적에 무관심했으며, 더욱이 50년대까지는 '고조선'이라는 국가가 실제로 존재했는지를 회의적으로 보거나, 고대 노예제국가가 아니라 원시 공동체사회로 보기도 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고조선'이라는 국가가 성립되었음을 입증할 만한 유물이 없다는 것. 이 가운데 사료연구 및 [[고고학]]적 성과[* 특히 [[랴오허|요하]] 지역에서 '강상무덤'과 '누상무덤'을 비롯한 [[순장무덤]]이 발굴되면서, 이런 순장무덤을 만들 정도면 이 시기에 고대국가가 성립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과거 80년대 한국 학계는 북한의 이러한 연구를 수용하기도 하였다. 현재에는 순장무덤이 아니라, 시간에 따라 집단매장된 공동무덤으로 본다.]가 뒷받침되자, 이후에는 7~8세기 요동~한반도 지역에 국가가 성립되었다고 여겼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북한은 학문의 자유가 나름대로 보장되었으며, 해방 전후로 유명한 학자들이 다수 월북한 터라, 남한보다도 어떻게 보면 우수한 학문적 성과가 쏟아져 나오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이러한 자유는 그 당시에도 어디까지나 비정치적인 분야에 한했으며, 이후 [[주체사상|제정일치국가(...)]]로 나아가면서 사라졌다.] 그러나 1993년 단군릉 발굴과 함께, 갑자기 "단군이 신화적 인물이 아니라, 실존인물이라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라고 언급하면서, '종래에 신화적 전설적 인물로 간주되어 온 단군이 실존인물이며 우리 민족의 원시조'라고 주장을 바꾸었다. 그 근거로는 무덤 안에 있던 두 남녀의 유골을 전자스핀 공명법으로 측정한 결과를 들었다. 그러나 전자스핀 공명법으로 뼈나 치아를 연대측정할 수 있긴 하지만 그 편차가 너무 큰 데다 아직 신뢰성에 문제가 많다. 그래서 전자스핀 공명법은 대부분 수천만 년 전 [[화석]]의 연대측정에 이용하는 편이다. 어쨌든 북한은 이 측정법으로 다른 기관 두 곳에서 각각 24회, 33회 측정했고, 매번 5011년(오차값 ±267년) 전이라는 결과가 나왔으므로 신뢰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남한에서는 이런 발표야말로 연대측정 결과를 조작한 증거라고 본다. 편차가 크고 신뢰도가 낮은 방법으로 수십 번 측정했는데, 결과가 매번 단 1년 차이도 없이 계속 똑같은 연대가 나왔다니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반면 남한의 역사학계에서는 '''단군릉이 [[고구려]]의 전형적인 반지하 외칸 석실무덤'''으로, 내부에서 발견된 [[토기]] 조각과 [[왕관|금동관]]을 고려하면 무덤의 주인은 '''고구려의 지방 귀족'''이었다고 추정한다. 또한 이 무덤을 '단군릉'이라고 칭한 기록이 남은 이유는 고구려가 망하고 수백 년이 지난 뒤, 옛 사람들이 '평양에 있는 오래된 무덤이니 혹시 단군의 무덤이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으로 본다. (더욱이 과거 사서의 기록에서도 고구려 유물과 함께 소개하는 경우가 있다.) 즉 굳이 표현하면 전(傳) 단군릉, 즉 '단군릉이라고 전하는 무덤'에 가깝다. [[구형왕릉]]의 북한판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단 구형왕릉은 애당초 무덤이 아니라는 주장도 제기되는 만큼, 일단 고대의 무덤임이 확실한 원래 단군릉과도 좀 다르긴 하다.] 심지어 1994년 북한에서 발행한 『단군과 고조선에 관한 연구론문집』에서도 단군릉의 원 양식은 고구려식 무덤이 맞고, 출토된 금동관 역시 고구려 금동관이 맞다고 서술하였다. 그러나 전자스핀 공명법으로 매장된 유골의 연대를 측정한 결과 그 측정치가 기원전 3000년 이상으로 나왔기 때문에 무덤의 주인은 고구려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북한은 고구려인들이 [[장수왕]] 시기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천도할 때 자신들의 시조왕인 동명왕릉을 새 수도 평양으로 옮겨오면서, 평양에 이미 존재하던 기존 단군릉을 고구려식으로 새로이 고쳤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북한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없다. 우선 아직까지 고구려에서 고조선 시대에 이미 있던 단군릉을 새로 개축했다는 기록은 발견된 바 없다. 또한 굳이 잘 있는 무덤을 파헤쳐서 무덤을 고구려식으로 개조한 뒤 유골에 고구려식 금동관을 씌우고 다시 묻었다 함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더군다나 단군 숭배 의식이 있어서 단군릉을 다시 만들었다면서, [[금관]]도 아닌 급이 낮은 금동관을 씌우고 고작 지방귀족 무덤 수준으로 축조했다는 말인데... 그럼 대체 원래의 단군릉은 얼마나 초라했다는 소리일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