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단두대 (문단 편집) === [[독일]]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Fallbeil_muenchen_1854.jpg|width=300]] [[뮌헨]]에서 쓰던 독일식 단두대 팔바일(모형) 독일은 프랑스 이후로 단두대 사용을 가장 자주 한 국가가 되었다. 독일어로는 팔바일(Fallbeil-떨어지는 칼날)이라고 한다.[* 독일어 단어 Beil은 도끼라는 뜻도 가지고 있는데, 이게 잘못 번역되어 [[제3제국]] 시절, 심지어 전후에도 독일에서 도끼 참수를 했다고 잘못 알려지는 경우도 있었다. 공식적으로 기록된 독일에서의 마지막 도끼 참수는 베니타 폰 팔켄하인(Benita Ursula von Falkenhayn)과 레나타 폰 나츠머(Renate von Natzmer)가 폴란드 및 영국에 협력한 [[간첩]] 혐의로 참수당한 것이다. 1938년 [[히틀러]]는 공식적으로 민간인에 대한 사형 방식을 교수형 및 단두대형으로만 제한했다. 물론 국내에서는 그랬다는 거고, 비공식적으로는 같은 시기 [[일본군]]이 그러했듯 국외 전쟁터에서 [[전쟁범죄]]의 형태로 집행되었다. 지금도 구글 등지에서는 1940년대에 [[아인자츠그루펜]] 대원들이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을 벌목 [[도끼]]로 죽이는 사진이 돌아다니고 있다.] 독일에서 원래 [[정치범]]에게는 주로 [[교수형]]이나 [[총살형]]을 집행하였고, 단두대형은 일반 흉악범에게 집행하였으나, [[아돌프 히틀러]] 치하의 [[나치 독일|제3제국]]에서는 즉결재판으로 사형을 언도받은 정치범의 처형에도 엄청나게 자주 사용되었다.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의 범인(으로 추정되는) 마리우스 판 데어 루페나 유명한 반나치 비밀결사였던 [[하얀 장미]]의 단원들도 단두대에서 최후를 맞았고, 패전 후에도 사형이 폐지되는 1949년까지 중범죄자 처형에 그대로 사용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게다가 나치의 경우 공포를 극대화하도록 피형자를 엎드리게 하는 게 아닌 피형자가 칼날을 보도록 눕혀서 형을 집행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독일이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 그리고 [[폴란드]]를 각각 [[안슐루스]], [[뮌헨 협정]], [[폴란드 침공]]으로 합병한 이후에는 이 세 지역에서도 쓰였다. [[빈(오스트리아)|빈]]과 [[프라하]] 그리고 [[포즈난]]의 단두대에서도 천여명의 정치범이 참수당하여 단두대는 이들 점령지에서 공포의 대상이 된다. 이들 중 1079명을 죽인 [[프라하]] 판크라츠(Pankrác) 교도소의 단두대는 나치들이 전후 도주할 때 전쟁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블타바 강에 냅다 버리고 도주했지만, 훗날 복구되어 지금도 전시되어 있다. [[파일:external/www.kriminalia.de/002.jpg|width=400]] 전쟁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연합군]] 공군의 폭격으로 인해 기존 교도소로 사형수를 이송해 처형하는 것도 촉박하고 위험해지자, 아예 처형 시간을 단축하고자 유대인을 처형할 때 쓴 [[가스형|가스바겐]]처럼 단두대를 탑재한 밀폐 [[트럭]]에 사형수를 태워서 형을 집행하기도 했다. 물론 나치는 전쟁 초반에 국민들에게 '배신자의 말로는 이런 것이다'는 의미로 조성하고자 [[총살형]]이나 [[교수형]] 등으로 진행하는 [[공개처형]]도 자주 실시했고, [[홀로코스트]]도 초반에는 [[아인자츠그루펜]]의 주도로 벌어진 [[바비야르 학살]]처럼 총살형 형식으로 자주 집행되었다. 하지만 전쟁이 장기화되자 군대에 공급할 탄약도 모자란 판에 왜 사형수에게 아까운 총알을 사용해야 하느냐는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혔고, 교수형의 경우에도 처형 현장의 사진 촬영을 엄격히 금지했음에도 기념품 삼아 병사들이 몰래 찍어간다든가 [[빨치산]]이나 [[레지스탕스]] 비밀 요원들이 몰래 촬영해가 전쟁 범죄 폭로의 증거물로 사용하는 일이 잦아지자 이렇게 비공개적인 형 집행 위주로 노선을 바꾸었다. 이것과 비슷한 사형집행장치로는 현재 중국의 이동형 사형집행버스가 있다. 물론 독일의 사형집행 트럭은 단두대고, 중국의 사형집행 버스는 [[약물 주사형]]을 집행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유사품으로는 발터 라우프(Walter Rauff)와 [[아르투어 네베]]가 고안한 것으로 알려진 이동식 [[배기가스]] 처형 트럭 [[https://en.wikipedia.org/wiki/Gas_van|가스바겐(Gaswagen)]]이 있다.] [[파일:external/thefifthfield.com/Johann-Reichhart.jpg|width=250]]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부터 [[나치 독일]] 때까지 단두대 처형을 전문으로 도맡아 집행했던 처형 전문가로 요한 라이히하르트(Johann Reichhart,1893~1972)가 있었다. 라이히하르트는 자신이 처형한 3,165명의 이름과 처형 시기를 기록해 놓았는데, 처형된 죄수들 중 대부분(2,876명)은 1939~1945년 동안 나치가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고 [[막장]]으로 치달을 때 집행되었다. 이들 중에는 연쇄 살인범 등 흉악범도 있었지만, 상당수는 정치범이나 저항 세력 구성원들이었다. [[하얀 장미]] 단원들의 처형도 라이히하르트가 집행하였고, 나치가 전쟁을 벌이며 유럽 각지를 점령하자 점령지역에서도 단두대를 트럭으로 싣고 다니면서 (주로 나치에 반항하다가 체포된 자들의)처형을 집행했다. 라이히하르트는 종전 직후에 나치 부역 혐의로 란츠베르크 교도소에 수감되었지만, 신분이 나치 당국에서 정식으로 인정받은 [[교도관]]이 아니라 일종의 특수 면허를 갖고 아웃소싱된 외주업자였기 때문에 엄한 처벌이 사실상 불가능했으므로 얼마 후 비나치화(또는 탈나치화. Entnazifizierung) 재판을 받고 석방되었다. 다만 라이히하르트는 1933년부터 나치당 산하 자동차 군단, 보훈처, 공공 복지회, 노동 전선 등에 가입해 활동했고, 1937년에는 나치 당원으로 입당한 전력도 있었기 때문에 완전 무죄 방면은 아니었고 비나치화 심사 기준에 따라 4단계인 단순 가담자(Mitläufer)로 분류되었다. 석방된 뒤에도 라이히하르트는 란츠베르크 교도소에 상주하며 연합군 측 사형 집행관들을 도와 전범으로 사형 판결을 받은 사형수 156명의 교수형 집행 시의 결박이나 발판 레버 조작 등을 담당했고,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의 연속 재판인 뉘른베르크 계속재판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피고인들의 처형에도 협력했다. 라이히하르트는 사형 집행 때마다 반드시 연미복, 흰 셔츠, [[나비넥타이]], [[실크햇]] 세트로 갖춰진 전통적인 집행인 복장을 착용하고 등장해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는 것으로 유명했다. [[파일:Rastatt.jpg|width=400]] 전후인 1946년에 만들어져 1949년까지 서독에서 9번 쓰인 라슈타트(Rastatt) 단두대. 동독에서는 칼날이 무거운 철제 테겔(Tegel) 단두대를 사용하였다. 종전 후 몇 년 동안에도 동서독 양측에서도 계속 사용되었는데, [[서독]]에서는 군정기 프랑스 점령지에서 [[빌리 파울 헤롤트]]를 비롯한 흉악범만 처형 전용으로 쓰였고 1949년 살인범 리하르트 슈흐(Richard Schuh)의 처형을 마지막으로 사형제 폐지와 함께 사라졌다. [[동독]]에서는 정치범[* 주로 나치의 일원이거나 협조했던 자들, 반정부 인사, 서방의 간첩 및 동독을 탈출하려 한 자]이나 흉악살인범[* 주로 연쇄살인범, 갱스터] 한정으로 단두대형이 집행되었으며, 그마저도 사용 횟수가 매우 적었다.[* 그밖에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들은 총살형이나 교수형으로 집행되었다.] 마지막으로 처형된 사람은 생체 실험 등 반인도적 행위를 저지른 죄로 기소되어 사형 판결을 받은 [[아우슈비츠]]의 군의관이자 [[슈츠슈타펠]] 단원 호르스트 피셔(Horst Fischer)였다. 1966년의 호르스트 피셔 처형 이후 단두대가 독일 땅에서 완전히 폐지되었으며 사형 집행 방식은 총살형으로 통일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