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단민당 (문단 편집) == 상세 == 단민당은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1석의 당선자를 냈던 대한민국의 과거 정당이다. 1948년 2월 15일 [[서울시]] [[중구(서울)|중구]] [[소공동]] 111번지에 사무소를 두고 단민당 [[창당준비위원회|주비회]](籌備會)[* 지금으로 말하자면 [[창당준비위원회]]에 해당한다.]를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48022200209201008&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8-02-22&officeId=00020&pageNo=1&printNo=7520&publishType=00020|조직했고]], 대표위원에 김낙영(金洛永), 김태룡(金泰龍), 박흥선(朴興善)이 취임했다. 3월 1일에는 [[최고위원]]에 김태룡, 김낙영, 박흥선, 정치부장에 김태룡, 조직부장에 김준식(金駿植), 선전부장에 김태수(金泰守)[* 이명 김령(金嶺).], 재정부장에 김낙영, 산업부장에 최일민(崔一民), 청년부장에 박흥선, 훈련부장에 임일범(林一凡) 등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48030200209201013&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8-03-02&officeId=00020&pageNo=1&printNo=7527&publishType=00020|부서를 결정했다]]. 이어 3월 22일 오전 10시 30분부터 오후 12시 30분까지 서울시 중구 [[명동1가]] 54번지 서울시장 공관(現 [[https://naver.me/GcWP4CuP|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결당식이 치러졌고, 이날 최고위원에 김태룡, 김낙영, 박흥선, 총무부장에 [[류성갑]], 정치부장에 김태룡, 조직부장에 최일민, 선전부장에 김태수, 재정부장에 김낙영, 산업부장에 오만영(吳萬泳), 청년부장에 임충재(任忠宰), 감찰위원에 김성광(金盛光), 김태실(金泰實), 박정익(朴政翊) 등이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48032400209201013&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8-03-24&officeId=00020&pageNo=1&printNo=7546&publishType=00020|선임되었다]]. 4월 12일 오후 1시 이승주(李昇柱)·박갑득(朴甲得) 외 40여 명의 대학생들이 단민당 본부를 습격해 청년부장 임충재와 청년부원 등 세 사람을 구타해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48041300239102019&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8-04-13&officeId=00023&pageNo=2&printNo=7643&publishType=00010|전치 1개월의 중상]]을 입힌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48041500209202008&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8-04-15&officeId=00020&pageNo=2&printNo=7565&publishType=00020|사건이 있었다]]. 이승주와 박갑득을 취조한 결과 이 둘은 단민당원으로서 일전에 당규를 위반해 청년부장 임충재에게 경고를 받은 바 있는데, 이에 앙심을 품고 [[린치]]를 가한 것으로 드러났다. 5월 10일 치러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1석의 당선자를 배출했다. 당시 당선자는 [[전라남도]] [[고흥군]] 을 선거구(제13선거구)에서 당선됐던 [[류성갑]]이다. 류성갑은 이후 단민당을 탈당해 1948년 6월 26일 [[대한독립촉성국민회]]에 가입했으며 1949년 9월 12일에는 [[대한노농당]]을 창당하는데 함께했다. 1951년 1월 27일에는 또 대한노농당을 탈당하고 [[대한국민당]]에 합류하였다. 7월 21일 단민당원 이상천(李相天)[* 본명 이상하(李相夏), 이명 이전만(李錢滿).]이 단민당에서 자신을 이용해 [[김구]], [[김규식]], [[지청천]] 등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을 암살 계획을 [[서울특별시경찰청|수도경찰청]]에 자백했고, 이튿날인 7월 22일 수도경찰청 사찰과에서 단민당 최고위원 김낙영의 가택을 수색하는 동시에 김낙영과 김태룡 등에게 수배령을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4807230023910201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8-07-23&officeId=00023&pageNo=2&printNo=7730&publishType=00010|내렸다]]. 그러나 7월 25일 [[내부고발자]]였던 이상천과 이재호(李梓鎬)가 돌연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48072800329202010&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8-07-28&officeId=00032&pageNo=2&printNo=562&publishType=00020|구속되었고]], 7월 27일 김낙영과 김태룡은 [[무죄]]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48072800209202007&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8-07-28&officeId=00020&pageNo=2&printNo=7655&publishType=00020|석방되었다]]. 그리고 7월 28일 단민당의 요인 암살 사건 계획 음모는 이상천의 날조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48072800209202007&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8-07-28&officeId=00020&pageNo=2&printNo=7655&publishType=00020|판명되어]] 곧 관련자 이종영(李鍾榮)과 함께 고소당했다. 9월 11일 오후 1시 단민당 본부 회의실에서 중앙집행위원회가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48090800209201007&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8-09-08&officeId=00020&pageNo=1&printNo=7691&publishType=00020|개최되었다]]. 1950년 5월 있었던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6626&docId=543171&categoryId=46626|대한정치공작대사건]](大韓政治工作隊事件) 당시 대한정치공작대 대장이 단민당에서 선전부장을 지낸 김태수, 대원 중에 단민당 최고위원을 지낸 김낙영이었고, 대한정치공작대사건의 진상을 보도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5005020020910200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0-05-02&officeId=00020&pageNo=2&printNo=8252&publishType=00010|1950년 5월 2일 동아일보 '대한정치공작대 사건진상']] 기사를 보면 김태수가 '''단민당이 흐지부지되자''' 주간신문 노동자농민보사 편집국장, 국회통신사 기자 등으로 근무했다고 하며,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50041100209102006&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0-04-11&officeId=00020&pageNo=2&printNo=8231&publishType=00010|1950년 4월 11일 동아일보 기사]]에 김태수와 김낙영 등이 1950년 2월 초부터 사설수사기관을 조직할 것을 계획했다는 것으로 보아 단민당 자체는 적어도 1949년도에는 이미 와해된 것으로 보인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단민당 , version=4)] [[분류:대한민국의 보수정당]][[분류:1948년 정당]][[분류:1949년 해체]][[분류:한국의 없어진 정당]]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