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단식투쟁 (문단 편집) == 역사 == 전근대에도 간혹 있었지만, 그때는 평등사회도 아닐 뿐더러 먹을 게 부족하다보니 평범한 사람이 '''일부러''' 단식을 한다는 개념자체가 없었고, 단식투쟁을 한다는 건 그냥 혼자 조용히 굶어죽을 테니 아무도 신경쓰지 말라는 의미와 상통했다. 그러다보니 주로 시전자는 [[왕]]이나 [[성직자]] 등, 단식으로 건강을 해치거나 사망에 이르는게 사회적 영향력이 컸던 사람들이였다. 고대 [[아일랜드]]에는 다른 사람과의 분쟁이 있을 때 억울함을 알리기 위해 그 사람 집 앞에서 단식하는 풍습이 있었다. 고대 중국에서는 [[백이와 숙제]]가 주나라가 역성혁명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는 스스로 곡기를 끊고 죽은 일화가 유명하다.[* 현대적인 의미의 투쟁이 아닌, 자살의 수단에 가깝긴 하다.] 한국 역사에도 종종 왕의 폐위에 반대해 식음을 전폐하다가 사망했다는 둥, 충격을 받아 식음을 전폐하다가 사망했다는 둥의 기록이 많이 나온다. 또한 조선의 왕, 왕비, 대비들이 정치적 싸움의 방법으로 수라와 탕약을 거부하는 단식을 행한 기록이 종종 나온다. 특히 신하들로선 왕/왕비의 건강을 해치게 만드는 건 어마어마한 불충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현대적인 의미의 단식 투쟁은 녹색혁명으로 [[인류]]가 만성 식량 부족으로부터 탈피하고, [[인권]]과 [[평등]]이라는 권리가 확실하게 자리잡은 이후부터, 즉 국가입장에서 국민이 한명이라도 아사를 하게되면 곤란하게 된 시점부터 본격적으로 세계 곳곳에서 써먹기 시작한 투쟁 방식이다. 대표적 사례로 인도의 성웅 [[마하트마 간디]]는 '''75세'''의 나이로 옥중에서 3주간이나 단식을 한 바 있다. 첨언하자면 단식 투쟁은 본래 부당한 권력에 구금된 수감자들이 주로 행한 투쟁방식이다. 우리나라 역사에는 식음을 전폐하는 사례가 있어 적합성이 떨어지지만, 현대에 행하는 물을 마시면서 유지하는 단식은 서구권에서 행하던 재소자들의 유일한 투쟁방식으로서 행해지던 것들이다. 재소자들은 신체를 구금당한, 즉 [[자유]]를 빼앗긴 몸이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남은 자유가 신체 유지를 위한 행동밖에 없기 때문에 이를 인질로 삼아 인질극을 벌이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구금이란 살아서 자유를 박탈하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처벌의 대상이 살아있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는다. 즉, 수감자들은 자신의 생존을 포기함으로서, 그리고 그 생존을 포기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권력의 비인도적 행위(재소자가 아사하는 것은 권력의 도덕성에 영향을 준다)라는 타격을 입히기 위해 하는 것이다. 물론 보복도 만만치 않았는데, 교도소 측은 이들의 단식투쟁을 저지키 위해 묽은 죽을 담은 호스를 목구멍에 마구잡이로 꽂아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2072008035|'강제급식']]을 실시했다. 대표적인 예로 1909~1913년까지 영국 여성참정권 운동가들이 옥중에서 단식투쟁을 하다 강제급식을 당했고, 아일랜드 독립운동가 토마스 애쉬도 더블린 감옥에서 투쟁 도중 강제급식으로 숨졌다. 한국에서도 [[비전향 장기수]] 손윤규, 김용성, 변형만 등과 같이 단식투쟁을 하다 강제 급식으로 숨을 거둔 사례도 있다. 이러한 행위는 뉘른베르크 선언 및 헬싱키 선언에서 명시된 인간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행위로 규정되어 1975년 '도쿄 선언'에서 금지하고 있다. 1981년 [[아일랜드 단식투쟁]]은 위에서 언급한 사례 중 최대규모로 이루어진 사례이며, 이를 바탕으로 의학자들은 단식의 최대 시한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 단식 투쟁을 주제로 만든 대표적인 영화가 [[http://movie.daum.net/moviedetail/moviedetailStory.do?movieId=18571&t__nil_story=tabName|어느 어머니의 아들]]과 [[http://movie.daum.net/moviedetail/moviedetailMain.do?movieId=46269|헝거]]] [[아일랜드 단식투쟁]] 사례에서 사망은 55-75일 사이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최초의 사망은 46일에 발생 했으나, 이는 급성 영양실조로 인한 수분 흡수 장애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의학자들이 정의한 단식에 부합하지 않아 빠지게 되었다. 이 사례를 바탕으로 의학계에서는 단식의 정의를 단식 후 공복통이 사라지는 72시간부터 사망에 이를 수 있는 72일까지로 정의하고 있다. 단식 후 72시간이 단식으로 계산되는 첫날인 이유는 이 시점이 되어야 체내에 저장된 모든 당이 소모되기 때문이다. 즉, 단식투쟁은 '''신체의 자유가 부당하게 박탈된 이들이 고안한, 그 끝과 한계가 명확한 투쟁 방식'''이라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