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단종(조선) (문단 편집) === 복권 === 한동안 단종의 폐위와 죽음은 정치적인 금기가 되었다. 이는 세조 다음의 왕들이 모두 세조의 직계후손들이기 때문이다.[* 8대 [[예종(조선)|예종]]부터 27대 [[순종(대한제국)|순종]]까지 모두 세조의 직계후손 왕들이다. 즉 세조 다음의 왕들이 낳은 자녀들과 그들의 후손들 또한 모두 세조의 직계후손이다. 순종 이후의 역대 [[대한제국]] [[왕위 요구자/아시아#s-2.2|황제위 요구자]]들 또한 모두 세조의 직계후손이다.] 하지만 유교 이념에 반하는[* 유교 이념 상 반란이든 세력다툼이든 뭐든 명분은 무조건 존재해야 했다. 하다못해 표면적인 핑계에 불과하다 치더라도 말이다. 예를 들어 훈구파가 사림파를 다수 제거한 4번의 사화는 모두 명분이 있었다. 헌데 계유정난은 이런 최소한의 명분조차 없었다. 비단 유교 이념이 아니더라도 정상적인 어떤 이념상으로도 계유정난은 명분이 아예 없었다. 물론 달콤한 권력을 얻는답시고 명분이고 뭐고 짓밟고 왕위를 찬탈하는 경우는 동서고금 막론하고 많았지만 단종이 쫓겨난 사례는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들정도로 매우 불운이 심하게 겹치고, 명분이 없었다.] 무력과 강압에 의지한 정변과 그로 인한 강제 폐위, 그리고 사사는 조선의 성리학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무도한 짓이었다. 단종이 당한 이 모든 수모에 대한 명분마저 전무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때문에 단종의 사후에도 그에 대한 논란이 불거지게 된다. 폭정과 실정이라는 해명거리가 있는 연산군[* 반대파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 지니친 엽색 행각, 민생 파탄.]과 광해군[* 반대파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폐모살제), 국가 재정을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궁궐 증축, 민생 파탄.]과 달리 단종은 12살에 왕위에 올라 어린 나이에 올랐다는 이유만으로, 17살에 반정 세력들에 의해 폐위되어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살아생전 폭정과 실정을 저지를 기회조차도 가져보지 못했다. [[연산군]]이 일으킨 [[무오사화]]의 계기도 이와 관련되어 있었으며, [[중종반정]] 이후 연산군이 폐위된 이후로도 [[사림]]에서 복권 논의가 나왔다. 사림에서 강력한 세력을 자랑하던 서인과 노론에서 적극적으로 단종과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의 복권을 주장하며[* 조선 유교의 거목이자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이 단종 복권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송시열은 단종 외에도 단종에게 충의를 다한 [[사육신]]들의 복권까지 주장하였다.] 중종과 효종 때 단종의 복권에 대한 사대부들의 지지 여론 형성에 나서며 단종에 대한 복위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사림이 단종 복권에 적극적인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단종이 당한 비극들은 이전에 조선의 주도권을 거머쥐고 뒤흔든 훈구 세력들의 만행이었고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으로 친조카의 정당한 왕위를 강제로 찬탈한 일은 아무리 조선의 선대 임금이 했다고 할지라도 성리학을 이념으로 삼아 어떤 일이든 명목과 그 명목에 합당한 본분을 갖추어야 한다고 인식하는 사림들과는 맞을 수가 없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사림은 권근과 같은 조선 건국에 크게 기여한 유학자들보다도 오히려 고려 왕조에 절개를 지키고 최후를 맞이한 정몽주를 조선 성리학의 시조 중 한 사람으로 삼고 크게 존경했다.] 계유정난을 적극적으로 미화했던 훈구파 세력이 서인에 흡수되어 계속 조선의 지배층으로 남아있기는 했지만, 애초에 서인 자체가 사림파에서 갈라져나온 거라서 결국 서인 내 훈구파계 후손들조차도 더 이상 계유정난을 대놓고 미화하지는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조선을 이끄는 지식인/지배층인 사림들의 단종 복권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중종대 소릉 복위, 노산묘에 대한 치제 거행, 노산군묘에 대한 수리와 치제 등으로 이어지며 점점 단종 복권의 여론이 형성되었다. 결국 [[숙종(조선)|숙종]] 7년(1681년) [[http://sillok.history.go.kr/id/ksa_10707021_001|노산대군으로 승격]]된 후 숙종 24년(1698년) [[http://sillok.history.go.kr/id/ksa_12411006_002|단종으로 복위/추존]]되었으며 동시에 단종의 부인인 [[정순왕후 송씨]]에게 '정순'이라는 시호도 함께 올렸다. 무력으로 폐위된 왕이기 때문에 단종릉에는 다른 왕릉과는 달리 무인석이 없다.[* 숙종은 이런 분야에 관심이 많았는지, 묘호가 없던 2대 임금 [[정종(조선)|정종]]도 당시까지는 명나라에서 준 시호인 공정왕으로 불리다가 이때 정종이 된다. 정통성이 강력해서인지 왕실 복권, 추승에 거리낌이 없었다.] 복권시킬 때의 명분은 [[완곡어법|단종이 강등되고 사사된 것은 세조를 모시던 신하들의 요청과 강요 때문이었기에, 단종을 복위시킨다고 세조에게 누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논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