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단종(조선) (문단 편집) === 능묘와 제사 === [[파일:external/hanja.pe.kr/king6-01.jpg]] 단종의 능호는 [[장릉(영월)|장릉]](莊陵)으로 여러 조선 왕릉과는 달리 [[경기도]]가 아닌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에 위치한다.[[http://whc.unesco.org/en/list/1319/multiple=1&unique_number=1613|#]] 참고로 [[북한]]에 있는 태조의 왕비 [[신의왕후]] 한씨의 제릉, 정종의 후릉, 그리고 왕릉의 제식을 갖추지 못한 연산군묘와 광해군묘는 세계유산이 아니다. 단종의 능은 이장되지 않고 엄홍도가 장사지낸 을지산 자락에 그대로 조성되었다. 설화대로 실제로도 명당이었다는 모양이다. 이로 인해 왕의 능은 100리 이내에 모셔야 한다는 《경국대전》의 규정을 따르지 않은 유일한 왕릉이 되었다. 엄홍도가 매장한 후 노산군의 노를 따 민간에서 노릉(魯陵)으로 불리다 중종 11년(1516년) 정식으로 묘를 찾아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중종(조선)|중종]] 대까지 단종의 능(장릉, 복권 전에는 '노산군 묘')을 아무도 몰랐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로, 단지 무덤에 [[제사]]를 지내지 않았기 때문에 기록이 없었을 뿐이다. 궁중의 금지옥엽으로 태어나 이렇게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고 왕실 족보에서도 제외되고 없는 단종의 [[제사]]를 왕실에서 지내줄 리는 없었다. 대신 [[생육신]]을 포함한 여러 충신이나 단종의 살아남은 일부 혈육들이 제각각 제사를 모시기는 했다. 공식적으로는 단종의 조카인 정미수[*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의 아들.]와 그 자손들이 단종의 제사를 지냈으며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가에서 치르는 제사였을 뿐이다.[* 몰래 지낸 것은 아니다.] 살아 생전에 노산군으로 강등되었기 때문에 [[종묘]] 신위에서도 빠져있었고 왕실족보에서도 빠져있었다. 그러다 중종 대에 '노산군 묘'에 대한 언급이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그때까지 80대의 고령으로서 생존해 있던 단종의 비 [[정순왕후(조선 단종)|정순왕후]]([[중종실록]] 내에서는 '노산군 부인') 때문이다. 중종은 당시 송씨의 딱한 처지를 듣고 재산을 새로 보태주는가 하면, 단종에 대해서도 최초로 제사를 지내주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남의 무덤을 잘 챙겨준 [[중종(조선)|중종]] 자신은 [[임진왜란]] 때 능이 도굴되는 바람에 시신이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단종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면 이런 빠른 처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고령이었던 [[정순왕후(조선 단종)|정순왕후]]는, 조정에서 받은 노비와 재물 등을 자신이 죽으면 시누이 [[경혜공주]]의 아들인 [[정미수]]에게 상속하게 하여 단종의 제사를 계속 지낼 수 있게 해달라는 부탁을 한 장면도 기록되어 있다. 이후 [[선조(조선)|선조]]이 정비를 하기도 했고, 최종적으로는 [[숙종(조선)|숙종]]이 단종의 추증과 복위를 승인함에 따라 뒤늦게 공식적으로 [[종묘]] 신위에 포함되어 역대 선대왕의 신위와 나란히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단종 신위는 종묘 정전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영녕전에 모셔진 유일한 조선 국왕의 신위이다. 한양에서 영월까지 따라와 그를 모셨던 [[궁녀]]들은 단종이 세상을 떠나자 모두 강물에 뛰어내려 자결했다는 식의 전설이 만들어져서, 훗날 숙종대에 단종이 복위되면서 그 궁녀들을 제사 지내는 단도 만들어졌다. 워낙 비극적인 장면이라 몇몇 사극에서도 이를 연출하기도 했지만, 궁녀는 [[내명부]]에 등록되어 궁궐 안에서만 일하게 되어 있는데, 폐위되고 부인과도 강제로 생[[이별]]하며 머나먼 영월까지 끌려가야 했던 (왕도 아닌) '노산군'을 궁녀가 따라가 모신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이런 전설이 당연한 듯 통했다는 건 그만큼 세간의 관심과 동정이 매우 컸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신기하게도 장릉 주변의 [[소나무]]는 마치 절을 하듯 장릉 방향으로 굽어져 있다. 정말로 장릉에 가면 볼 수 있다. 특히 능역 근처에 가면 단종의 능을 향해 유난히 기울어진 소나무가 한 그루 남아 있는데, 이 소나무를 '충절송'이라고 부른다.[* 참고로 청령포에 있는 단종 어소(거처) 주변의 소나무도 어소 방향으로 굽어진 것을 많이 볼 수 있으며, 어소 바로 옆에는 장릉의 충절송처럼 유난히 기울어진 소나무가 있다.] 또한 장릉이 갖는 특징 하나가 무덤을 수호하는 석물인 무인석이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단종이 무신 세력을 등에 업은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