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담조전쟁 (문단 편집) === 채견유의 반란 === 그러던 중 1923년 6월, 호남 서부에 주둔한 탄옌카이계 장령인 원릉(沅陵) 진수사 채견유(蔡䋌猷)와 자오헝티 사이에서 아편 취수 문제로 분쟁이 발생했다. 자오헝티는 채견유를 면직하였는데 탄옌카이 계 장령들은 자오헝티에게 채견유 면직 철회를 요구하는 한편 탄옌카이에게 호남으로 돌아올 것을 청했다. 이에 6월 13일 자오헝티는 채견유를 독판으로 부임하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지으려 했는데.... 7월 13일에 채견유가 호남 서부의 독립과 자오헝티 토벌령을 발표하면서 전쟁이 터졌다. 7월 15일에 자오헝티는 쑨원 및 서남의 각 성에게 연치정부 조직을 제안했지만 7월 16일 쑨원은 탄옌카이를 호남성장 겸 상군 총사령관에 임명하여 호남 내부의 혼란을 부추겼다. 7월 20일의 장령회의에서 장령들은 군사 대응을 반대하고 평화 해결을 주장했다. 7월 25일에 상군 군장 17인이 성헌 옹호, 자오헝티에 대한 복종과 채견유 토벌을 통전했다. 다음날인 7월 26일, 탄옌카이가 호남에 돌아와 호남성장 및 북벌토역군총사령관에 취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