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담조전쟁 (문단 편집) === 화평의 결렬과 우페이푸의 참전 === 9월 14일부터 탄옌카이와 자오헝티 사이의 화평교섭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10월 14일 중립을 지키며 중재에 나서던 루디핑이 탄옌카이에 합류하면서 화의는 결렬되었고 10월 17일 자오헝티는 [[우페이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우페이푸는 즉각 이에 응해 악주에 양호경비총사령부를 설치, 스스로 총사령관에 취임하고 휘하 장령들을 파견하여 자오헝티를 돕게 했다. 또한 자오헝티의 측근이자 바오딩 군관학교 학맥을 중심으로 하는 1사단 2여단장 [[탕성즈]]가 신파 장령들을 규합하여 자오헝티를 지지하게 했다. 11월 2일 채견유 부대가 창사에서 직군의 공격에 격퇴되었고 [[11월 14일]] 탄옌카이는 압도적인 직군의 공격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쑨원의 지시에 따라 루디핑 등을 거느려 광동으로 퇴각했다. 12월 31일, 자오헝티가 채견유의 잔여부대를 완전히 격파하면서 담조전쟁은 자오헝티의 승리로 끝났다. 자오헝티는 성의회에서 전쟁 중 탄옌카이에 협력하거나 성헌취소 운동을 벌인 의원들을 제명하기 위해 제명심사위원회를 조직했다. 이로 인하여 6명의 의원들이 제명되고 탄옌카이와 자오헝티의 중재에 실패해 호남을 떠난 국회의장 임지자(林支字) 등에게도 숙청의 칼날이 가해졌다. 또한 학생, 노동자 단체 등에 대해 자오헝티는 더 이상 믿을 수 없다고 여겨 11월 호남자치대학을 치안에 문제를 일으킨다는 이유로 폐쇄하고 수구산공인구락부가 탄옌카이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폐쇄, 반발하는 노동자들의 시위를 유혈진압했다. 또한 악북농공회도 폐쇄되고 잔혹하게 진압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