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당계전쟁 (문단 편집) == 배경 == 1927년 [[4.12 상하이 쿠데타]]로 [[중화민국 국민정부]]가 난징과 우한으로 분열된 이후, [[우한 국민정부]]에 속한 [[탕성즈]], [[장파쿠이]]의 동정과 [[중화민국 북양정부]] [[장쭝창]]의 남하에 동시에 노출되어 큰 군사적 위기에 처하게 된 난징 국민정부의 [[장제스]]는 [[리쭝런]]과 [[바이충시]]를 비롯한 [[계계군벌]]의 압력 속에서 8월 12일에 공직에서 사퇴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명목으로 외유를 떠났다. 우한 국민정부에서 목표로 삼던 장제스가 사라지자 우한과 난징이 더 이상 분열될 이유는 없어 보였고 9월 초부터 [[탄옌카이]] 등이 난징과 접촉하여 9월 15일 난징과 우한의 위원들이 중앙집행-감찰위원회 임시회의를 소집, 9월 21일 [[서산회의파]]까지 망라하여 국민당 중앙특별위원회가 성립, [[영한합작]]이 이루어져 세개로 나누어졌던 [[중국국민당]]은 하나로 합쳐졌다. 하지만 당중앙은 합쳐졌지만 시작부터 난황이 있었다. 우선 [[왕징웨이]]가 [[서산회의파]]의 맹렬한 비난 속에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명목상의 직위에 불과한 국민정부위원 자리만 부여받자 실망하여 사직을 선언하고 추종자들과 함께 다시 우한으로 떠나버렸고[* 여기엔 [[구멍위]]와 [[천궁보]]가 특별위원회 참석은 왕징웨이 측의 법통을 말살시키는 결정이라고 반대하며 설득한 것이 주효했다.] 각 지방의 당부들도 삐딱한 반응을 보였다. 9월 25일 <항주민국일보>는 절강성당부, 강소성당부, 난징특별시당부의 명의로 특위 반대 성명을 내놓았고 광저우 정치분회는 특위가 내린 취소명령을 거부하고 도리어 군사위원회 광저우 분회 증설을 요구하여 10월 11일 끝내 설치했다. 특위의 정치분회 취소 명령에 호응한 곳은 오로지 9월 30일 해산한 절강성 정치분회 뿐이었다. 여기에 각 지방마다 군벌들이 당원들을 추방하며 당무를 보지 못하게 방해했다. 여기에 우한의 탕성즈는 난징으로의 합류를 거부하고 8월 우한 정치위원회 주석단 결의안에 의거, 9월 21일 [[천궁보]], [[구멍위]] 등 [[왕징웨이]] 계열의 개조파를 규합하여 우한 정치분회를 발족한 후 "특위는 국민당 당장(黨章)에 전혀 성립의 근거가 없는 불법기관"이라고 비난하며 반 특위 활동을 전개했다. 탕성즈, 구멍위, 천궁보 등이 상무위원으로 추대되어 호북, 호남, 안휘 3개 성을 관할하고 특별위원회와 대립했다. 특별위원회는 우한 정치분회의 취소를 결의했지만 우한 정치분회 역시 다른 정치분회들 처럼 특위의 요구를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쥐정]], [[쉬충즈]] 등 서산파의 일원들이 직접 우한으로 찾아와 왕징웨이와 탕성즈를 설득하려 했으나 이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