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당계전쟁 (문단 편집) === 탕성즈의 동진 === 국민당의 여러 당파가 합작을 위해 논의하고 있는 사이, 탕성즈는 휘하의 병력들을 유지하기 위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끊임없이 동진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9월 6일, 탕성즈의 군대가 무호(蕪湖)를 점령하고 9월 8일 난징 국민정부가 수립한 안휘성 정부와 안휘성 성당부의 무효를 선언, 250여명의 당원을 난징으로 추방하였고 당원들은 특별위원회에 중앙의 구제를 요청하였다. 한편 사직 선언을 내놓고 잠적했던 왕징웨이는 구강에 머물던 중 탕성즈가 보낸 특사를 만나 군사적 동맹을 얻기 위해 우한으로 이동했다. 왕징웨이와 탕성즈는 의논 끝에 상술한 대로 9월 21일 우한에 정치분회를 설치하고 구멍위, 천궁보, 공경(孔庚), 등수전(鄧壽荃), 그리고 탕성즈 자신을 상무위원으로 추대하여 상무위원회를 구성하고 9월 28일 난징의 특별위원회가 중앙당의 직권을 대행하는 것은 당장에 아무런 근거가 없으며 비록 당의 합법적인 기관이 회복되지 않은 상황에서 특위를 기초로 한 정부를 사실상의 정부로 인정할 수는 있으나 특위의 당무와 정치에 관한 결의를 인정할 수 없다고 통전했다. 또한 탕성즈는 공경, 등수전, 왕지(王岐)로 구성된 재정위원회를 조직하여 호남, 호북, 안휘에 대한 재정 확보에 나서는 한편 9월 27일 35군 군장 [[허젠]]을 대리주석에 임명하여 안휘성 정부를 발족시키고 35군 주력을 안경에 배치, 합비외 화현으로 병력을 전진배치하였다. 또한 유흥의 36군을 무호로 배치하고 유흥을 강소성 정부주석에 임명하였다. 이는 특별위원회의 권위에 공공연히 도전을 한 것은 물론이요 아예 군사적인 공격을 감행한 것이었다. 탕성즈의 군벌적 행태에 우한 내부에서조차 불만이 표출되었으나 탕성즈는 아랑곳하지 않고 난징을 공격하겠다는 의사를 표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