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당계전쟁 (문단 편집) === 왕징웨이의 조정 === 참다 못한 특위 내부에서 탕성즈를 토벌해야 한다는 주장이 터져나오기 시작했고 탕성즈 토벌에 대해서 결정을 하지 못하던 난징 국민정부도 탕성즈 무력토벌 쪽으로 방침을 굳히게 되었다. 이에 왕징웨이가 중재자를 자처하여 자신의 거중조정으로 우한 방면 동지들의 의혹이 모두 해소되었으며 이후 군사상의 합작정신이 완만하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전보를 난징에 보내 군사적 충돌을 피하고자 했다. 이는 자신의 군사적 동맹자인 탕성즈의 무력기반이 약화되는 것을 막기 위한 교육책이었다. 이에 난징 측에서도 왕징웨이 회유에 나섰다. 난징 국민정부는 대표를 파견하여 구강에서 왕징웨이와 회담하였으나 성과가 없자 다시 우한까지 찾아가 우한 측 위원들과 탕성즈 회유에 대해 논의했다. 10월 11일, 난징측 대표들과 왕징웨이, 탕성즈, 리지선의 대표들이 장시간 회담하여 왕징웨이의 주장에 따라 난징에서 4중전회를 개최하자고 합의하였다.[* 원래 기존에는 우한 국민정부가 개최한 3중전회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바로 3차 전국대표대회를 열자는 것이 합의사항이었으나 자신의 정통성을 인정받고 싶었던 왕징웨이는 3중전회의 합법성을 전제로 하는 4중전회 개최를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 보고를 받은 [[탄옌카이]], [[리쭝런]], [[허잉친]], [[청첸]]이 모두 동의를 표하고 11월 1일 난징에서 4중전회를 개최하자는 구체적 일정을 발표했다. 하지만 탕성즈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군사적 확장에 집중하고 있었고 [[장파쿠이]], [[주페이더]]와 접촉하면서 난징을 전복할 음모를 꾸몄다. 이 소식이 난징에 전해지자 난징 국민정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무력 토벌을 결의하게 되었다. 1927년 10월, 국민정부 군사위원회는 탕성즈를 토벌하기 위한 서정군 편성방침을 하달하였다. * 1. 서정군 총지휘는 [[청첸]], 부총지휘는 [[리쭝런]]이 맡는다. * 2. 제3로군 총지휘는 [[리쭝런]]이 겸임하며, 장강 북안에 주둔하고 있는 제7군, 제19군, 제30군, 제37군을 관할한다. * 3. 제4로군 총지휘는 [[청첸]]이 겸임하며, 장강 남안에 주둔하고 있는 제6군, 제13군, 제44군을 관할한다. * 4. 제5로군 총지휘는 [[주페이더]]가 담당하며, 강서 서북부의 수수, 동고, 평향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제3군, 제9군을 관할한다. * 5. 제8로군 총지휘는 [[리지선]]이 담당하며, 광동의 소관부터 광서의 전주에 이르는 일대에 주둔하고 있는 방정영, 이복림, 황소횡, 범석생 부대를 관할한다. * 6. 호북 서부에 주둔하고 있는 제9방면군 예하 [[루디핑]]의 제2군과 이환의 신편 제34군을 동원한다. * 7. 예군 총사령인 번종수가 이끌고 있는 하남 남부의 예군 각 부대, 그리고 [[천사오콴]] 사령이 이끄는 해군 제1함대, 장정우 사령이 이끄는 항공 제1대와 제2대 및 수상비행대를 동원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