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당백전 (문단 편집) === 발행 === >좌의정 [[김병학]]이 아뢰기를, "백성들의 생활은 어렵고 재정은 다 떨어졌는데 건축 공사를 크게 벌이고 있으므로 공사(公私) 간에 일을 더는 지탱해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 >신은 이에 밤낮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하면서 어떻게 하면 잘 조절하여 메워 나갈 수 있을까 생각하였지만 아직 그 방책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돈이라는 것은 경중을 잘 맞추어 준절하여 쓰는 물건입니다. 옛적에 당십전이나 당오전을 쪼개어 당이전이나 당삼전으로 만들어 쓴 법은 모두 일시적으로 임시변통한 정사였습니다 지금 나라의 재정이 몹시 고갈된 때에 응당 이익되는 것과 손해보는 것을 절충해서 쓰는 원칙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당백대전(當百大錢)을 주조'''하여, 널리 쓰이고 있는 통보(通寶)와 함께 사용한다면 '''재정을 늘리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감히 신의 좁은 소견을 대번에 반드시 시행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의정부 당상(議政府堂上官)에게 하문하시기를 바랍니다."하니, > >하교하기를, "'''진달한 것이 아주 좋다. 속히 시행하도록 하라'''."하였다. >---- >[[고종실록]], 고종 3년(1866년) 10월 30일 [[http://sillok.history.go.kr/id/kza_10310030_002|2번째 기사]] 조선 후기에는 [[삼정의 문란]]으로 인해 세금이 제대로 징수되지 않아 정부의 재정이 매우 궁핍하였고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의 중건을 추진하면서 이에 많은 노동력과 재원이 투입되면서 조선은 더더욱 궁핍해졌다.[* 경복궁 중건에 들어간 돈은 원납전으로만 무려 750만냥이 들어갔다. 현물 징수나 노동력 강제동원 등은 모조리 제외한 금액으로도 이 정도인데 순조 22년에 호조에서 낸 통계에 따르면 조선 조정의 1년 세수는 평균 60만냥이므로 대원군이 걷어들인 원납전은 조선 조정의 12년분 예산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인 것이다. 물론 이것에는 당백전과 청전 발행으로 이어지는 인플레이션의 영향도 있는데, 결국 청전이건 당백전이건 모조리 다 폐지해야 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결국 빚잔치나 한 셈이다. ] 이 때문에 실시되었던 조선 조정의 정책은 백성들에게 --강제로-- 기부를 받는 [[원납전]]이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기부--···-- 금액이 줄어들자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당백전을 발행하기로 하였다. 1866년 ([[고종(대한제국)|고종]] 3년) 11월에 당백전을 발행하여 6개월 간 유통하였다. 당백전의 명목상 가치는 [[상평통보]] 1푼의 100배인 1냥에 해당했지만 소재 가치는 상평통보의 5배 ~ 6배에 지나지 않으므로 단순히 화폐 가치만 볼 경우 조선 정부는 당백전 1개를 제조할 때마다 상평통보에 비해서 18배의 [[시뇨리지|이득]]을 본다.[* '''[[화폐수량설]]에 따른 인플레이션을 배제한다면 말이다.'''] 당대에 유통되던 상평통보의 총액은 약 1천만냥(약 10억 푼)으로 추정되는데, 이 때 풀린 당백전의 총액은 적어도 공식적으로 1600만냥 정도나 되었다. 즉, 시장에 기존의 1.5배에 달하는 자금이 풀린 셈이다. 물론 실물 경제는 그대로인 상황에서 화폐만 불어났으니 전국적으로 그 이득을 훨씬 상회하는 엄청난 손해가 벌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