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당백전 (문단 편집) === 폐지 === 이렇게 경제상황이 악화되고 백성들의 불만은 하늘을 찌르고 당당하던 [[흥선대원군]]조차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니 결국에는 1867년 4월에 주조를 중단하고 회수하기 시작했으며 그 다음해에는 유통도 금지되었다. 이렇게 폐지된 당백전 1600만 냥[* 상평통보의 총합이 약 1000만 냥이었다.]을 회수할 때는 청전[* 淸錢, 청의 화폐. 청의 화폐도 조선 말기 상평통보 가치의 1/3 정도로 통용되곤 했다.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수입하기도 했고, 밀수로 유입되기도 했다. 애초에 고려 시대부터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A%B1%B4%EC%9B%90%EC%A4%91%EB%B3%B4&ridx=0&tot=19|당의 화폐]]들을 들여와 사용하곤 했다. 생경해 보이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화폐경제가 발달하지 못해 제대로 된 화폐가 없는 경우 의외로 흔하게 벌어지는 일로, 이렇게 유입된 외국 화폐를 '''유입전'''이라고 한다. [[고조선]]에서 통용되던 [[신나라]] 화폐인 [[화천]]이 또 다른 예시다. 현대에도 조금 남아 있는데 미국 달러 등을 쓰는 [[짐바브웨]]나 중국 위안을 쓰는 [[북한]], 일본 엔화를 쓰는 러시아가 대표적인 사례다.] 1냥이나 상평통보 1냥으로 교환해 주었고[* 명목 가치는 1/100, 실질 가치는 1/6이 된 셈이지만 유통이 금지된 상황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공식적으로 주조한 화폐를 녹여서 금속을 건지려고 했다가는 당시 조선의 국법으로 처벌받았다.] 이렇게 회수한 당백전은 다시 녹여서 철로 만들어 버렸다. 문제는 청전이 당백전에 비해서나 양화이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상평통보에 대해서는 악화라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청전의 유통량이 전체 화폐의 40%를 넘겨 버렸다. 결국 청전은 화폐 경제를 부식시켰고 화폐 불신도 당백전보다는 느렸지만 그 진행은 꾸준했다. 문제는 이 속도가 느리다는 것 때문에 대원군은 정권에서 밀려나는 그 순간까지 청전의 유통을 금지하지 않았고 누적되었던 모든 문제에 더해서 경제적인 문제가 더해지면서 결국 대원군은 정권에서 밀려났다는 점이다. 결국 대원군을 밀어낸 고종은 청전을 그제서야 폐지했는데 이는 당연히 디플레이션으로 이어졌고 조선 조정은 이미 올라 버린 물가로 인해서 세수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당백전으로 회수된 금액이 1600만 냥인데 시중에 풀린 상평통보와 이전 화폐의 총 양은 1000만 냥으로 추정된다. 즉, 초기에는 장에 풀린 당백전이 물가상승을 이끌면서 [[인플레이션]]을 만들었지만 당백전이 시장에서 퇴출되면서 당백전으로 교환한 화폐의 양을 어디서 벌충해 올 수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됐고 시장에 화폐가 부족해지니 물가는 떨어지는데 화폐의 가치가 오르는 [[디플레이션]]으로 전환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당백전만 유통되고 기존의 상평통보 같은 화폐가 다시 시중에 나올 리가 있을까? 이 당백전을 회수하느라 조선의 조정에서는 다시 상평통보나 그것과 비슷한 가치를 지닌 유입전(청전)을 주고 폐지 작업에 들어갔지만 화폐가 부족해져서 물가가 내려간 디플레이션에서 갑자기 대량의 이전 화폐가 시중에 유통되기 시작하면 단순하게 저울추가 평행으로 이어지지가 않는다. 위의 대책은 오히려 화폐의 가치 하락을 부추김으로써 오늘날 우리들이 당백전의 문제로 알게 되는 조선 경제에 [[인플레이션]] 효과를 불러오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