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관식 (문단 편집) === 한국사에서의 즉위식 === 한국사에서는 [[신라]]는 전임 임금이 승하하면 일단 후임자가 즉시 왕위를 물려받아 즉위하고, 그 다음 해 봄인 [[음력]] 1월 ~ 2월경에 [[경주시|경주]] 서남쪽에 있는 시조묘(초기) 혹은 [[신궁(신라)|신궁]]([[지증왕]] 이후)에서 즉위 의례를 거행하였다. 이 관례는 2대 [[남해 차차웅]]이 시조묘를 건립한 후 천년동안 거의 대부분의 임금이 꼬박꼬박 지켰으므로, 신라만의 제도화된 즉위의식으로 여겨지고 있다. 시조묘에서 모신 신은 여러 설이 있으나 1대 [[혁거세 거서간]]으로 보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다만 대부분의 왕이 2년차 신궁 방문을 지키긴 했어도 정확한 시기가 고정된 건 아니었는데, 신궁 참배를 언제 하는지 자체는 융통성이 있었던 듯 하다.[* 1월에 할지 2월에 할지는 제각각 다르고, 특이 케이스로 예를 들어 [[경덕왕]]은 미루다가 즉위 3년차에 신궁 제사를 지냈고 [[진덕여왕]]은 가을인 10월에 신궁 제사를 지냈다.] [[고려]]에서는 [[인종(고려)|인종]]이 즉위한 후 고려 역대 왕의 [[어진]]을 모신 경령전에 가서 즉위를 고하고, 역대 왕의 위패를 모신 태묘와 9릉에는 사신을 보내 즉위를 고하는 형식이었다고 한다. [[조선]] 왕조의 경우, 대행왕이 승하하자마자 곧바로 즉위식을 거행하는 것이 아니라 서거 엿새째 되는 날 상복인 최복(衰服)을 입게 되는 성복(成服) 직후에 즉위식을 거행했다. 대행왕의 관을 모시는 빈전(殯殿) 문 밖에서 열리게 되는 즉위식장엔 왼쪽에 대보(大寶)로도 일컬어지는 옥새가, 오른쪽엔 대행왕의 [[유언]]인 유교(遺敎)가 놓였다. 면복을 입은 새 국왕이 빈전을 향해 향을 올리고 나면 [[영의정]]이 유교를 읽고 [[좌의정]]은 대보를 왕에게 전했다. [[옥새]]는 왕이 서거한 즉시 [[왕대비]]나 [[대왕대비]]에게 전해지고, 그들은 새 임금이 즉위 예식을 거행할 때까지 이를 보관했다. 빈전 밖에서 진행된 즉위의 예식이 끝나면 새 국왕은 연을 타고 대전으로 가 임금이 앉는 어좌가 있는 어탑(御榻)의 오른쪽 계단으로 올라가 [[용상]](龍床)에 정좌하게 되는데, 바로 이때를 새 국왕이 탄생하는 순간으로 여긴다. 참고로 조선에서 이런 방식으로 처음으로 즉위한 왕은 5대 [[문종(조선)|문종]]이다. 문종 이전의 4명의 조선 왕들은 [[이성계|1명]]은 개국 군주였고 [[정종(조선)|나머]][[이방원|지 3]][[세종대왕|명은]] 전부 선대 왕이 살아있을 때 [[양위]] 받아 즉위했기에 저런 방식으로 즉위하지 않았다. 개국 군주 [[이성계|태조]]는 옥좌를 내놓지 않고 버티던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을 폐위시킨 후 즉위했고 조선 건국 후 [[무인정사]]로 권력을 잃고 [[영안대군]]에게 양위했고 아무런 권력이 없던 [[허수아비]] 정종은 동생 [[정안대군]]에게 양위했고 태종은 [[충녕대군]]이 세자가 된 해에 양위했다. 이렇게 3명의 왕들이 연속으로 살아있을 때 양위했고 4명이 왕들이 연속으로 선대 왕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즉위하다가 세종이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양위하지 않고 재위하다가 사망, 세자 이향이 즉위하면서 조선이 드디어 상술한 방법으로 즉위식을 거행하기 시작했다. 즉, 개국 군주이거나 선대 왕이 살아있을 때 [[양위]]나 [[반정]] 같은 방법으로 즉위한 태조, 정종, 태종, 세종, 세조, 예종, 중종, 인조, 순종은 저런 방법으로 즉위하지 않았다. 무려 조선의 군주의 3분의 1이나 된다. 대행왕 승하 후 기다리는 기간은 정통성 등 위기의식에 따라 짧아질 수도 있다. [[광해군]]은 이복동생 [[영창대군]] 문제로 불안감을 느낀 지지파에 떠밀려 하루만에 즉위했으며, 심지어 [[성종(조선)|성종]]은 사촌 [[제안대군]]과 친형 [[월산군]] 등이 존재하는 와중에 정통성의 문제로 당일에 즉위했다. 재위기간 중 즉위식을 두번 거행한 사례도 있었는데, [[고종(대한제국)|고종]]은 1864년 국왕으로 즉위했을 당시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식을 치렀으며,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 대한제국의 [[황제]]로서 [[환구단]]에서 제사를 지내고 황제로서의 즉위식을 다시 치렀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대한제국)|순종]]은 근대화 이후인만큼 전통적인 방식의 즉위식이 아닌, 서양식 즉위식을 거행했다. 서양식 건물인 [[덕수궁 돈덕전]]의 알현실에서 즉위식이 열렸으며, [[환구단]]에서 고유제를 올리는 대신 일본으로부터 국서를 받았다고 한다. 이후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총리대신]] [[이완용]]과 통감 대리 [[하세가와 요시미치]], 영사 대표 방카르트가 황제의 즉위를 축하하는 축하문을 낭독했다. 즉위식장에 참석한 이들은 전통 의복이 아닌 서양식 대례복이나 [[프록 코트]]를 입었으며, 사배례[* 왕에게 네 번 절해 예를 갖추는 것] 대신 몸을 공손하게 숙이는 서양식 인사법을 했다고 한다. 전통 악대인 전정궁가와 서양식 군악대가 모두 등장하였다는 점이 특징인데, 순종 황제가 등장과 퇴장할 때와 참석자들이 인사할 때 전통음악을 연주하였다. 군악대는 [[에케르트]]가 서양음악 어법으로 작곡한 [[대한제국 애국가]]를 연주하였다. 즉위식이 끝난 후 각계에서 기념행사가 펼쳐졌는데, 돈덕전의 식당에서는 서양식 연회가 열렸다. 특히 [[일진회]]는 독립관에서 매우 성대한 경축회를 벌였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