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구광역시/역사 (문단 편집) == [[일제강점기]] == [Include(틀:일제강점기의 부)] 조선 말까지만 해도 대구는 [[경상도]]에서 [[경주시|경주]], [[상주시|상주]], [[진주시|진주]]보다 작은 도시였다. 하지만 [[경부선]] 철도의 부설로 인해 경부선 철도와 낙동강 수운의 교차점에 위치한 대구는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반면 경부선 철도 노선에서 소외된 경주, 상주, 진주는 상대적으로 쇠퇴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말 대구는 [[서울특별시|서울]], [[평양시|평양]], [[부산광역시|부산]]에 이어 네 번째로 큰 도시로 성장했다. [[파일:attachment/대구광역시/역사/daegu1914.jpg|width=500]] 1914년 4월 1일 실시된 [[부군면 통폐합]]으로 인한 대구부와 달성군의 행정구역 상황.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대구부는 현재의 중구 일원만 '''대구부'''로 남고, 나머지 영역은 현풍군과 통합하여 '''[[달성군]]'''으로 분리되었다. 일본어로 대구는 たいきゅう(타이큐), 달성은 たつじょう(타츠죠)라 발음했다. 1917년 달성군 수성면 대봉동이 대구부에 편입되었다. 1938년 달성군 성북면 남부, 달서면, 수성면이 대구부에 편입되었다. 이 때, 성북면 북부([[금호강]] 이북)는 공산면에 편입되었고, 달서면에 속했던 감삼동이 성서면으로 편입되었다. 또한 해안면은 동촌면으로 개칭되었다. 이 때부터 [[공산동|공산면]]과 동촌면은 달성군의 [[월경지]]가 되었다. 당시 대구는 조선의 [[모스크바]], 동양의 [[모스크바]]라는 별칭에 걸맞게 [[공산주의]] 색이 아시아 중에서도 특히 짙은 지역이었다.[* 같은 시기 평양은 [[기독교]] 색이 짙어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렸다.] 1946년의 [[대구 10.1 사건]]이 대표적이다. [[경상감영공원]]에 [[대구 10.1 사건]]의 흔적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