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구읍성 (문단 편집) == 구조와 모습 == 대구읍성의 성벽은 지금의 [[중구(대구)|중구]] 지역 대부분, 그러니까 지금의 [[동성로(대구)|동성로]], [[서성로(대구)|서성로]], [[남성로(대구)|남성로]], [[북성로(대구)|북성로]] 거리를 따라 있었다. 읍성 동서남북으로는 진동문, 달서문, 영남제일관, 공북문의 사대문과, 동/서 소문이 있었으며 여첩이 8백 19개, 성 모퉁이에 망루가 4곳 있었다. 읍성 안에는 [[경상감영]], [[객사]](달성관)가 있었으며 경상감영을 중심으로 대구부의 관청들이 즐비하였다. 읍성의 남서부와 동남부를 중심으로 백성들의 주거지역이 형성되어 있었고, 특히 달서문과 진동문 밖에서는 큰 시장이 열렸다. 대표적인 것이 [[서문시장(대구)|대구 서문시장]]이다. 읍성 안에서는 [[약령시(대구)|대구 약령시]]도 열렸는데, [[중국]]의 상인들이 찾아와 장사하기도 했다. 대구읍성은 프랑스의 유명한 지리학자 샤를 바라(1842∼1893)가 극찬했던 문화유산이었다. 그는 1888년 가을에 조선을 여행한 후 귀국해 발표한 <조선기행>을 통해 '대구읍성은 북경성을 축소해 놓은 듯 아름답다'라고 감탄했다. >“우리는 그처럼 화려한 행렬을 이루며 도시의 내부를 오랫동안 둘러보았다. 나에게 성벽 위에서 한 번에 조망할 기회를 주기 위해 행렬이 성의 순시로를 돌았는데, 그 길은 [[베이징 성]]에 있는 것의 축소판과도 같은 인상을 주었다. 도시 전체를 둘러싸고 평행사변형으로 성벽이 이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 각 벽면의 중앙에는 똑같은 규모의 요새화한 성문이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으며, 그 위로 우아한 누각이 세워져 있었다. 누각의 내부는 과거의 사건들을 환기하는 글귀와 그림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거기서 나는 가을의 황금빛 들판을 구불구불 흘러가는 금호강의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내 발 아래로 큰 도시의 길과 관사들이 펼쳐져 있었다. 서민이 사는 구역에는 초가지붕들이 이마를 맞대고 있었고, 양반들이 사는 중심부에는 우아한 지붕의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 > 샤를 바라 <조선기행> [[https://www.jung.daegu.kr/new/culture/pages/visit/page.html?mc=0029|대구광역시 중구청]]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