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도(무기) (문단 편집) === [[중일전쟁]] 시기 === [include(틀:2차 세계대전/중화민국 보병장비)] [include(틀:보병장비 둘러보기)] [[파일:external/www.m8d.cn/13.jpg]] 대도를 장비한 [[국민혁명군]]의 모습. 세월이 지나 [[중국 국민당]]이 [[중국]]의 정권을 잡고 독일의 도움을 받아 군의 근대화에 매진하였으나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 군대가 그러하였듯이 군수품의 불충분과 화력의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특히 20년대 이후로 주목받은 [[참호전]]과 근접전, 그리고 [[기관단총]]이라는 분야가 그러하였다. 기관단총이라는 것이 권총탄을 사용하는 소형 기관총으로써 출발하여 참호에 돌입하여 압도적인 화력으로 청소해버린다는 개념으로 주목을 받았으며 자연히 중국도 [[MP18]] 기관단총과 [[마우저 C96]]계열 [[권총]]을 국산화하여 이러한 세계적 기준에 따라가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실전에서 탄약휴대량이 많아야 이러한 개념을 실현할 수 있는데 중국은 이러한 개념에 걸맞는 수준의 탄약을 지급할 능력이 되지 못했으며, 자연히 근접전투 중 총탄이 떨어질 것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하여 근접전 병력은 대도를 휴대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1933년 [[열하사변]] 중 활약한 [[쑹저위안]]의 29군 휘하의 대도대가 유명하였으며 1937년 이후 [[중일전쟁]]에서 많은 활약을 하여 '''항일대도(抗日大刀)''', '''항전대도(抗戰大刀)'''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게 되었다. 보통은 그냥 대도라고 불렸으며, 항일대도는 이 시대의 물건에 특별히 의미를 부여하여 호칭할 때 쓰이는 단어이다. [[일본군]]은 [[청일전쟁]] 때부터 중국군의 대도를 경험하여 중국군이 [[청룡도]]를 사용한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만큼 큰 인상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데 중일전쟁이 개전하면서 일본군은 [[엘랑 비탈|프랑스식 돌격주의]]를 계승한 총검돌격을 주요 전술로 삼아 중국군을 압도하는 화력, 병력의 질을 바탕으로 [[우쑹 전투]]에서 1만 명 전사의 피해를 내면서도 독일식의 오송 요새와 상하이 요새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한다. 이에 자신을 얻은 일본군은 중일전쟁 내내 총검돌격을 주요 전술로 삼았는데, 이러한 배경에서 일본군과 중국군간 백병전이 심심찮게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중국군의 [[마우저 C96|C96]] 기관권총과 군용 대도의 조합은 실전성이 높았다고 한다. 전투에서 일본군은 대도의 강한 베기 성능과 기세에 큰 인상을 받았다. 중국군의 전략거점인 우한이 일본군에 함락된 이후 전선이 고착화되면서 중국군이 소규모로 침투하여 백병전을 벌이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였고, 이 때문에 대도는 중국군 내에서 상당히 많은 숫자가 장비되었다. 주요 산업지대를 모두 빼앗긴 중일전쟁 중반 이후부터는 중국군의 화력이나 탄약 수급이 더 나빠졌기 때문에 싸고 쉽게 만들 수 있는 대도의 활용도가 더 늘어났다. [[일본 육군]]도 그 때문에 원래 규정상으로는 도검을 소지해서는 안 되는 [[하사관]]과 [[병사]][* 일본군에서 도검은 장교의 권위를 상징했다.]들도 도검 소지를 암묵적으로 허용받았다. 이른바 [[이종군도]]가 전선에서 유행한 이유였다. 대도 자체는 화력의 강화와 함께 자연히 사라질 운명이었지만 일본군 특유의 돌격주의 신봉과 중국군의 보급 사정상 화력의 부족, 그에 따라 자주 일어나는 백병전에 필요한 근접전 장비가 필요한 상황이 맞물려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의 자료, 참전자들의 증언, 무술가들의 이론, 그리고 현대의 모의 등으로 검증한 결과, 실전에서 대도는 효용성에서 총검에 밀림이 현대의 다수 중국인들도 인정하는 중론이다. 우선 리치에서부터 차이가 나는데다 대도를 휘두르는 동작은 총검의 찌르기에 비해 비효율적이고 체력 낭비가 심하다. 또한 베여서 난 상처보다 찔려서 난 상처가 더 깊고 아물기 힘들다. 여기에 보급이 열악했던 중국군들은 백병전에서 중요한 요소인 피지컬이 일본군보다 훨씬 딸렸고, 훈련수준이나 멘탈 역시 일본군보다 못했다.[* 중국군에 비해 일본군들은 훈련도 충실한 편이고, [[전쟁범죄|전쟁포로를 총검술 훈련 샌드백으로 삼는 방법]]을 써서 병사들의 살육에 대한 거부감을 없앴다.] 그래서 백병전으로 넘어가면 중국군은 압도적으로 불리한 교환비를 냈고, 그나마 중후반부부터 병사들도 경험이 생기고 일본군 포로들에게서 노하우 등을 전수받으면서 나아졌다고 한다. 말하자면 겉보기에는 폼나지만 실상은 화기는커녕 냉병기인 총검조차도 제대로 보급받지 못해서 대도로 때워야 했던 당시 중국군의 열악함을 상징한다고 할까...[* 총검을 제대로 보급받았다고 해도 당시 중국군들이 쓰던 중정식 소총이나 한양조 소총은 일본군의 38식 소총에 비해 길이가 짧았기에 백병전은 여전히 열세였다. 사실 이건 38식 소총이 유난히 길었던 탓이기는 하지만. 다만 [[7.92mm]] 탄을 썼기에 화력은 앞섰다. 다만 소총이 긴 것이 반드시 백병전에 유리하진 않다. 백병전이 일어나게 되는 주요 전장인 참호 속은 비좁기 때문에 소총이 길수록 휘두르면 걸리기 쉽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참호전의 대표격인 1차 대전 참호전에서도 병사들은 백병전에 총검을 부착한 소총 대신 야전삽 등을 휘두르기도 했다. 게다가 건장한 서양 병사들도 버거워 할 정도로 길고 거추장스러운 게 당대 볼트액션 소총들인데, 체격이 작은 편인 동양 병사들이 휘두르기엔 오히려 긴 소총이 불리할 수 있다.] 위의 대도대로 알려진 부대도 정식 명칭은 권총대였고, 실제 주무장으로 활약한 것도 권총이었지만 당시 언론들에서 국민들의 사기를 고양시킨답시고 대도의 역할을 과대포장해 선전하였고, 덕분에 대도 뽕을 맞은 국민들이 전선에 대도를 다수 기증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장창]]도 쓰였지만 휴대성, 편의성, 화기와의 겸용성 등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총도 제대로 지급 못할 정도로 장비가 정규군들보다도 더 열악했던 팔로군이나 민병대 정도를 제외하면 널리 보급되진 못했다. 중일전쟁에서 대도를 최초로 부각하기 시작한 부대는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중일전쟁의 계기를 마련하기도 한 허베이 지방의 29군으로 알려졌다. 작곡가 마이신(麦新)은 [[루거우차오 사건]] 후 군가 대도진행곡(大刀進行曲)을 지어 29군을 기리기도 했다. 그래서 대도진행곡의 부제도 "29군 대도대에게 바친다(獻給二十九軍大刀隊)".([[http://wapbaike.baidu.com/view/529623.htm?adapt=1&|#]])중국에서 국민혁명군 29군은 루거우차오 사건 이전의 [[열하사변]] 당시에 일본군을 상대로 결사전을 벌인 이 대도대로 유명해서 2007년에 이들을 소재로 한 [[중국 드라마]] "큰 칼로 왜놈들의 머리를 부수자(大刀向鬼子头上砍去)" 가 나오기도 했다. ---[[BFG9000|큰 칼... 존나 큰 칼이 필요하다...]]--- || {{{+1 '''대도진행곡[br]大刀進行曲''' }}}[br]작곡(作曲) : 맥신(麥新) || || [youtube(Uoc0Y9MVopc)] || || 大刀向鬼子們的頭上砍去,[br]큰 칼로 왜놈[* 鬼子(뀌쯔)는 원래 귀신이란 뜻이지만 중국에서는 일본군을 말한다. 그러므로 왜놈이라는 번역이 맞을 듯. 자세한 것은 [[르번구이쯔]] 항목 참조.]들의 머리를 부수자, 全國武裝的弟兄們,[br]온나라의 무장한 형제들아, 抗戰的一天來到了,[br]항전의 날이 다가왔다, 抗戰的一天來到了。[br]항전의 날이 다가왔다. 前面有东北的義勇軍,[br]일선엔 동북(만주)의 의용군, 後面有全國的老百姓,[br]후선엔 전국의 국민들, 咱們中國軍隊勇敢前進![br]우리 중국군대는 용감히 전진! 看准那敵人,[br]적을 보고 겨누자, 把他消滅![br]그들을 소멸하자! 把他消滅![br]그들을 소멸하자! (喊) 衝啊![br](함성) 돌격! (唱) 大刀向鬼子們的頭上砍去![br]큰 칼로 왜놈들의 머리를 부수자! '''(喊) 殺![br](함성) 죽이자!'''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