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동강 (문단 편집) === [[남북국시대]] ~ [[고려시대]] === 본래 전통적으로 겨례에서 가장 번영하고 발전한 지역이었던 대동강 유역이 쇠퇴하기 시작한 것은 [[고구려]]가 [[당나라]]에게 정복당한 때부터 였다. 당시 당나라는 고구려를 정복한 뒤에 대동강 유역의 인구 상당수를 다른 지역으로 이송했다. 고구려를 완벽하게 짓이기기 위해서 한 조치로 보이지만 덕분에 북방 유목민족이 너무 강해져서 [[당나라]] ~ [[송나라]]에 이은 한족의 수난시대가 시작된다. [[당나라]]가 [[고구려]]의 영토를 북방 [[유목민족]]과 고구려 유민들에게 뺏기면서 대동강 유역 또한 다시 뱉어 냈지만 애초에 정복한 이후 관리를 하지 않았음은 물론 대동강 유역이 [[발해]]와 [[통일신라|신라]]의 [[국경]] 지역이 되어버리는 바람에 쇠퇴했다. 사실상 남북시대에는 버려진 것과 마찬가지로 대동강 유역은 [[한반도]]에서는 비교적 꽤 규모가 되는 [[평야]]가 존재하는 지역이었음에도 버려졌다. 이 상태는 신라가 분열했다가 [[고려]]로 재통일되고 [[발해]]가 멸망해 발해유민이 고려로 귀순하는 과정에서 대동강 유역이 고려의 영토가 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고려가 건국되고 안정되자 고려의 시선은 다시 대동강 유역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고려]]는 [[고구려]]를 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었고, 고구려의 수도가 대동강 유역의 평양이었으므로 자연스럽게 대동강 유역을 다시 중요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평양]]은 [[서경]]이라 높여서 부르게 되었고 고려의 태조인 [[왕건]]은 서경을 중요시해야한다는 유지를 내린바 있으며 또한 서경은 제 2의 수도로서 존중받았다. 대동강 유역은 다시 번영하는 듯했으나, 고려가 안정화되면서 후방이 되어 비교적 안전한 지역이 된 옛 신라의 가문들이 번성하면서 중앙 정치를 신라계가 잠식하기 시작했고, 고구려 계승의식이 신라 계승으로 교체되면서 다시 대동강 유역은 버려졌다.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대동강 유역이 다시 겨례의 중심지가 될 마지막 기회였다고 볼 수 있다. 대동강 유역이 다시 등한시 된 것은 정치적인 이유 뿐만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남경이었던 한강 유역에 밀렸다는 이유도 있는데, 쌀농사는 밀농사에 비하여 효율이 3배 이상이고 당연히 인구부양력도 3배 이상 좋았는데, [[조선시대]] 이전까지 대동강 유역은 쌀농사가 안되는 지역이었다. 덕분에 전란으로 인구가 유지가 안되는 대동강 유역에 비하여 후방인데다 인구부양력이 높았던 한강 유역에 밀리기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금나라]]가 성장하면서 [[여진족|여진계]]가 [[한반도]]로 계속 밀고 내려왔는데, 덕분에 대동강 유역은 꽤나 불안정한 지역이었다. 결국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될 때까지 대동강 유역은 변방에서 인구가 좀 많은 지역이라는 오명을 벗어나지 못했다. 고려도 조선도 쌀농사와 안정으로 인구규모가 큰 [[한강]] 유역을 주시했고, 버려진 대동강 유역에 비하여 한강 유역은 고려말에 남경개창도감이 생기고 조선시대엔 [[한성부|한양천도]]라는 수혜를 받으면서 성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