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동강 (문단 편집) === [[일제강점기]] ~ [[소련군정|해방 초]] === [[경술국치]]를 맞이하여 [[대한제국]]이 [[일본제국]]에 [[합병|병탄]]당하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이후, 평양은 [[식민지]] 조선에서 제 2의 도시로 취급되었다. 식민지 치하에서 [[남포]]와 [[신의주]]가 [[상업]]도시로 성장했기 때문에 [[평양]]은 [[서비스]]의 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다. 덕분에 대동강 유역은 [[남포]] - [[평양]]의 경제권을 형성하게 된다. 이 경제권 덕분에 대동강 유역의 인구는 계속해서 늘어났다. [[대한제국]] 인구가 고작 약 1800만 명[* 대한제국의 행정체계문제로 인구집계가 정확하지 않다. 1910년 기준으로 1300만 명에서 1700만 명이었을 것으로 파악한다.][* 한국사를 격하하는 사람들 중에는 대한제국 인구가 500만 명에서 800만 명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1918년 [[3.1운동]] 당시 조선 인구가 약 2000만 명이었고 해방된 1945년 당시 조선인구가 약 3000만 명이므로 조선의 출산율과 사망율 그리고 해외이주를 고려했을 떄, 500만 명에서 800만 명이었으면 해방 후 3000만 명이라는 인구는 나올 수가 없다.]이었는데 해방 당시 북한지역인구만 1000만 명이고 그 중 상당수가 태백산맥 서쪽, 특히 [[평양]] - [[남포]] - [[사리원]]의 북부 평야권에 살고 있었으므로 대동강 유역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알 수 있다. 일본제국도 이 인구를 기반으로 [[한반도]] 북부에 대한 병참기지화를 수행했는데, 그 병참기지화의 핵심이 [[중공업]]을 육성하는 것이었으므로 대동강 유역은 함흥-원산 선과 함께 한반도의 주요 공업지역으로 성장했다. [[일본제국]]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후에는 [[만주 작전]]으로 밀고 들어오던 소련이 [[3.8선|3.8선 분활]]로 대동강 유역을 점령했다. 소련은 공업이 발전한 [[함흥]]을 북한의 중심지로 하려다가 북한 정부의 설득을 듣고 평양으로 중심지로 선택했다. 소련군정은 자국의 전후복구를 위해 점령지의 공장을 약탈했고 상당수의 기계들이 소련으로 옮겨졌다. 대동강 유역 또한 소련군정기에 침체기를 맞이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