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동여지도 (문단 편집) === 흥선대원군이 불태웠다? === [YouTube(9CwjAKvOtWY)] 김정호가 지도를 만든 뒤 '이렇게 정확한 지도는 외적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라는 혐의로 옥사했으며 목판도 불태워졌다는 설은 '''사실이 아니다.''' 흥선대원군이 불태웠다는 낭설은 1925년 동아일보에서 [[최남선]]이 쓴 걸로 추정되는 칼럼 〈고산자를 회(懷)함〉[[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25100800209201008|상]][[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25100900209201006|하]] 내용에서 비롯된다. 여기에서는 대동여지도의 위대함을 칭송하면서 그 가치를 몰라본 조선 관헌들에 의해 목판을 압수당했다고만 기술되어 있다. > … 조선 특절의 영적 보탑인 대동여지도는 그만 '''몰이해한 관헌에게 그 판목을 몰수'''당하고… > ---- > 《동아일보》 1925년 10월 9일자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25100900209201006|고산자를 회함 (下)]]〉 그런데 이를 기초로 [[1935년]]에 발간된 [[조선어]] 교본인 《조선어독본》에는 이것이 [[흥선대원군]]의 명이었다는 내용이 덧붙여진다. 하지만 여기서도 지도를 찍어낸 목판을 압수했다고만 되어 있지 '불태워졌다'는 말은 없다. > 원래 돈업시 하는 일이고 보니, 그 엇지 용이(容易)하랴마는, 철석(鐵石)과 같은 그가, 이런 것을 구애하랴. 즉시 경성(京城) 서대문(西大門)밖에 집을 잡고, 소설(小說)을 지어 얻은 돈으로, 근근히 일가(一家)의 생계(生計)를 삼아가는 한편, 하나 둘식 판목(版木)을 사 모아서, 틈틈이 그의 딸과 함께 지도판(地圖版)을 새겻다. > 그리하야, 다시 십여년(十餘年)의 세월(歲月)을 걸려서, 이것도 완성(完成)하얏슴으로, 비로소 인쇄(印刷)하야, 몇 벌은 친(親)한 친구에게 나누어 주고, 한 벌은 자기(自己)가 간수하야 두엇섯다. 그런지 얼마 아니되여,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어남으로, 자기(自己)가 간수하얏든 것을, 어느 대장(大將)에게 주엇드니, 그 대장(大將)은 뛸 듯이 깃버하며, 곳 이것을 [[흥선대원군|대원군(大院君)]]께 바첫섯다. > 그러나, [[흥선대원군|대원군(大院君)]]은 다 아는 바와 같치, 배외심(排外心)이 강(強)한 어른이시라, 이것을 보시고 크게 노(怒)하사 "함부로 이런 것을 만들어서, 나라의 비밀이 다른 나라에 루설되면, 큰일이 아니냐." 하시고, 그 '''지도판(地圖版)을 압수(押收)'''하시는 동시(同時)에, 곳 정호(正浩) 부녀(父女)를 잡아 옥(獄)에 가두섯드니, 부녀(父女)는 그 후(後) 얼마 아니가서, 옥중(獄中)의 고생을 견디지 못하얏는지, 통탄(痛嘆)을 품은채, 전후(前後)하야, 사라지고 말앗다. > ---- > 《조선어독본》 5권 4과 〈김정호(金正浩)〉 이후 이 이야기가 널리 퍼지면서 '''목판이 불태워졌다'''고 확대되어 해방 후 국어 교과서와 [[위인전]]에도 널리 실리는 바람에, 1980년대까지만 해도 모두가 이를 사실이라 여겨왔다. 하지만 소실된 것으로 알려졌던 대동여지도 목판은 두 차례에 걸쳐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첫 번째는 [[1983년]]에 공개된 김양선 목사[* 한국인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은 7명 가운데 하나인 김관근 목사의 셋째 아들이다.]의 소장품 1장이었다. 김양선 목사는 [[평안북도]] [[선천군]] 출신인데, 이곳에서 1920년대부터 한국의 초기 교회사 자료들을 대거 수집해왔다. 그러다가 점차 다른 한국 문화재 전반으로 수집 범위를 넓혀 해방 이전까지 한국 교회사 자료 및 문화재 약 9천여 점을 모았다고 한다. 이후 공산 정권의 핍박을 피해 월남하면서 6천여 점은 가져오는데 성공했으나, 나머지 3천여 점은 그대로 북에 두고 올 수밖에 없었다.[* 북한 땅에 남겨놓은 문화재를 옮기는 과정에서 아내와 딸을 잃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이 수집품들도 다시 [[6.25 전쟁]] 통에 유실될 위험에 처했으나, 미군의 도움으로 간신히 일본으로 후송될 수 있었다. 이들은 일본 [[국제기독교대학]]에 위탁 보관되었는데, 전쟁 중의 혼란 속에 김 목사가 보관증을 분실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종전 후에도 송환에 매우 오랜 시일이 소요되었다. 일찍 송환받은 교회사 자료와 문화재는 그의 모교 숭실대학(현재 [[숭실대학교]]) [[http://old.100thcouncil.com/mnu01/mnu01_06_01_06.html|박물관]]에 기증되었으나, 1970년에 김 목사가 작고할 때까지도 행방이 묘연한 문화재들이 남아 있었다. 그러던 [[1983년]]에 추가 유물이 [[국제기독교대학]]에서 발견되었으며, 대학 측과 유가족의 노력 끝에 이들도 마저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3112400239110003|송환]]되었다. 그런데 이 송환 문화재 가운데 '''대동여지도 목판 1장'''이 있었던 것이다. 김 목사가 이 목판을 입수한 경로는 불분명하나, 그의 소장품 가운데 김정호와 가까운 사이였다는 실학자 최한기의 유품이 많았으므로 이 역시 최한기의 소장품이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최한기가 빼돌려 기적적으로 소각을 모면한 유일한 목판으로 알려져 있었다. 두 번째는 시간이 흘러 [[1995년]]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서 한꺼번에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5121200289122002|발견]]된 목판 11장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6.25 전쟁]]통에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정체를 알 수 없는 수장품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들도 그들 가운데 하나였다. 학예사들도 이것이 대동여지도의 목판 같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으나, 목판 원본은 소각되었다는 통설 때문에 이것들은 복제품이라고 믿고 있었다 한다. 하지만 이때 학계 전문가들과 합동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원본이라는 증거들이 발견되었고, 결국 [[1996년]]에 이들 모두 김정호가 직접 새긴 원작 진품이라는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6020400209130005|판정]]이 내려졌다. 이로 인해 대동여지도 목판이 소각되었다는 설은 완전히 허구로 판명되었으며, 1990년대 중후반 이후 출판되는 위인전은 이런 오류를 거의 다 고쳤다. 이후에는 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1장의 입수 경로에 대해서도 추가적인 사실들이 드러났다. 이는 원래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었던 것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대동여지도 목판 대금 청구서'와 '대동여지도 목판 대금 지출결의서'도 남아 있었다. 여기에는 [[1924년]]에 이 목판들을 총 60원(오늘날 가치로 약 720만원에 해당)에 구입한 것으로 나오는데, 이들 유물을 판매한 사람은 놀랍게도 [[최남선]]의 아들 최한웅으로 [[https://www.chosun.com/culture-life/relion-academia/2021/10/30/6RDSTLV5QRAHTNI3RF5XVDP5ME/|기록]]되어 있다. 즉, 이들 목판은 [[최남선]]이 소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최남선]]이 이들을 어떤 경로로 입수했으며, 왜 다시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넘겼는지는 밝혀진 바 없다. 또한 그 이전에도 역사학계에서는 [[흥선대원군]]이 김정호와 대동여지도를 핍박했다는 설을 여러 근거로 부정해왔다. [[이병도]]는 김정호 옥사설을 강력히 부인하며 그 근거로 여러 가지를 들었다. 김정호가 만든 지도나 지지 어느 것 하나 몰수당하거나 압수당한 일이 없다는 것이다. [출처:<한국의 명저>(현암사, 1969)의 "不滅(불멸)의 아틀라스 靑邱圖(청구도)·大東地志(대동지지)·大東輿地圖(대동여지도) 金正浩(김정호)"] 오상학도 옥사설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고종실록]]』, 『[[승정원일기]]』, 『[[추안급국안]]』 등을 검토했으나 그러한 흔적은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게다가 김정호가 죄를 받아 죽었다면 [[유재건]]이 『이향견문록』에 수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유재건은 김정호가 몰(沒)했다고 표현한다. 만약 김정호가 옥사했다면 물고(物故)당했다고 써야 옳다. 만약 김정호가 옥사를 치렀다면 김정호와 교류하였던 최한기나 재정적 후원자였던 최성환, 신헌 등도 연루되어 어떠한 처벌이라도 받았어야 할 텐데 그러한 기록이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게다가 이들은 [[정승]] 반열에 든 고위관료였으며 직접 김정호의 지도에 서문을 지어주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들을 근거로 볼 때, 김정호가 옥사했다는 이야기도 역시 허구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