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륙타통작전 (문단 편집) === 3단계 === 헝양 전투로 이치고 작전은 3개월 간 지연되었으나 그 3개월 동안 스틸웰의 처리 문제를 놓고 미국과 중국 사이의 파워 게임이 벌어지고 있었다. 스틸웰은 마침내 해고되었지만 일본군에 맞설 준비는 하나도 되어 있지 않았다. 일본군 6개 사단, 1개 독립기갑여단, 제2비행집단으로 구성된 16만 대군이 구이린, 류저우의 공군 기지들을 노리고 있었다. 중일전쟁에서 일본군은 중국군을 오합지졸로 얕보고 있었으나 구이린에 투입되는 일본군은 헝양에서 중국군의 놀라운 분투에 바짝 긴장하고 있었으며 11군 사령관 요코야마는 11군이 전멸할 수도 있을 것이라면서 후속 부대에게 공을 넘기는 각오로 싸우라고 훈시할 정도였다. 일본군의 공세에 맞서는 중국군은 [[장파쿠이]]의 4전구 휘하 20만 명이었으나 이들은 2개월은 버틸 수 있을 것이라던 장제스의 호언장담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싸우지도 않고 달아났다. 오로지 [[광시]] 출신인 바이충시와 [[리쭝런]]의 병사들만이 일본군에 맞서 항전했다. 구이린 전투에서 중국군 6천명이 전사하고 1만 3천명이 포로로 잡혔다. 11월 24일에 난닝이 함락되었고 12월 10일 불중 국경이 일본군에게 장악되면서 일본군은 목표로 하던 것을 모두 성취하였다. 이후 1945년까지 철도를 따라 중국군 소탕작전이 벌어졌다. 이치고 작전의 피해는 절망적이었다. 중국군은 전사자와 부상자, 포로를 합쳐 50만 대군을 잃었으며 4개 전구가 괴멸적 피해를 입었고 장강의 3전구는 아예 일본군에게 포위당했다. 일본군 역시 10만 명의 병력을 잃었으며 9명의 장군이 전사했으나 [[공산당]]을 막던 부대들까지 죄다 투입했던 중국의 당시 피해는 너무도 심각했다. 일본군은 1944년 말에는 충칭 함락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이에 새로운 미국 참모장인 [[앨버트 웨드마이어]] 장군은 두차례나 수도를 [[쿤밍]](곤명)이나 청두(성도)로 옮길 것을 청했지만 장제스는 이를 거부했다. 다행히 일본군은 장제스가 충칭을 잃는다고 항복할 인물이 아니며 병참의 문제와 중국 해안선을 통한 미군의 강습을 우려하여 병력을 모두 철수시킴으로서 충칭은 무사할 수 있었지만, 중국은 5개 성, 6천만명이 거주하는 땅을 빼앗겼으며 동부 해안 함락 이후 중국의 경제력을 지탱하던 [[곡창지대]]를 모두 상실했다. 이로 인해 중국군은 이른바 '지식청년군'이라 하여 엘리트 학생들까지 모병해야 했다. 이전까지 장제스는 향후 중국의 인재 육성에 중요한 중등교육과정 이상의 학생들의 징집을 면제했는데, 인적 피해가 워낙 심각해서 어쩔 수 없이 자원 입대의 형태로 모병을 하게 된 것이다. 본래 10만명의 인원을 예상했는데 14만명의 학생들이 모병에 응해서 목표를 초과달성할 수 있었다. 다만 이들은 훈련을 받고 부대를 편성하기도 전에 전쟁이 끝나서 별다른 활약이나 피해는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