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만/스포츠 (문단 편집) == [[대만프로야구|야구]] == [[야구]]는 [[대만]]의 '''[[국기(스포츠)|국기]]'''라 할 만큼 명실상부 대만 최고의 인기 스포츠다. 1999년 새로 제정된 [[대만 달러]] 500달러에 원주민 학생들로 구성되어 전국대회를 제패한 리틀야구팀을 도안의 상징으로 삼은 것만 봐도 그 인기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대만 사람들도 이 지폐 도안의 모델을 타이둥 출신의 리틀야구 월드시리즈 우승팀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 지폐에 등장하는 선수들은 대부분 1986년~1987년생으로 프로 2군까지 진출했었거나 실업야구팀에서 아직까지 현역으로 뛰는 선수가 있다.] 다른 웬만한 모든 구기 종목들로는 전부 거의 다 중국에 반도 따라가지 못하지만 야구 만큼은 아주 완벽히 확실하게 실력으로 중국을 압도한다 [[대만일치시기|일제강점기]] 초기만 해도 야구는 일본인의 스포츠라고 해서[* 물론 [[야구]]는 엄연히 '''[[미국]]'''에서 만들어진 스포츠다. 일제 식민지 시절, 일제에 의해 대만에 야구가 이식되고 정착했기에 이런 이미지가 붙었다.] 대만 사람들이 배척하던 스포츠였지만 문화와 스포츠를 통한 동화작업을 진행함에 따라 야구를 대만에 이식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31년 대만의 가의농림학교(嘉義農林學校, 현 국립자이대학의 전신) 야구단이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고시엔]]에서 준우승을 하면서 대만에서의 야구붐은 절정에 이르렀다. 당시 고시엔에 참여하던 내지 밖의 조선, 만주, 대만 팀과 달리 가의농림학교 야구단에서는 대만인과 일본인 사이의 주전/비주전 차별이 없었기에 이러한 붐이 일게 된 것이다. 가의농림학교 야구단의 이야기는 KANO[* 가의농림학교(嘉義農林學校)의 준말 嘉農를 [[일본 한자음]]으로 읽은 것.]라는 영화로 2014년 제작되어 히트를 쳤다. 일제가 패망하고 [[중화민국]]이 대만을 통치한 이후로 일본의 스포츠였던 야구는 자연스레 정부로부터 홀대를 받게 되었다. 대신 [[장제스]]와 [[중국 국민당|국민당]]은 축구와 농구를 '중국인의 스포츠'라면서 대대적으로 밀어줬다. 원산야구장이 미군에게 공여가 되면서 1959년까지는 타이베이 시내에 야구장이 없는 상태가 지속될 정도로 야구는 철저히 외면받았다. 그러나 중국은 대만을 국가로 인정할 수 없다며 1960년대부터 [[FIFA]]와 [[FIBA]]에 심한 간섭과 압박을 가해 결국 대만이 국제 대회에 제대로 참여할 수 없게 만들었다.[* 축구는 1989년이 되어서야 AFC에 복귀하게 되었고 FIBA 산하의 농구 대회에는 Formosa라는 이름으로 참여해야만 했다.] 그런 상황에서 1968년 타이둥의 한 초등학교 야구팀을 주축으로 한 팀이 일본 간사이 대표를 꺾으면서부터 장제스 정권은 야구를 프로파간다로 삼기 시작한다. 또한 야구라는 매개체를 통해 미국과 우호 관계를 증진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여기에는 설마 소년체육에 정치적인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 불참을 강요하겠냐는 계산도 있었다. 대만의 [[리틀야구]] 실력은 아시아 최강의 수준을 자랑'''했었'''다. 한때 [[리틀야구 월드시리즈]]에서 17번이나 우승을 차지했다.[* 대만이 마지막 우승하던 90년대 중순까지만 해도 미국이 무려 25번 우승으로 역대 최다 우승기록을 가지고 있었고 2017년 대회까지 미국은 무려 35번 우승을 차지했다. 미국은 각 지역을 별개로 집계한다. 가령 '미국 동부'와 '미국 남부'의 우승을 따로따로 계산한다. 미국 각 지역 리그팀이나 학교 팀이 거둔 우승기록을 합치면 미국이 최다 우승이다.] 야구 종주국 미국 리그팀에 이어 대만은 역대 2번째 우승국으로 만만치 않은 성적을 거뒀었다. 그러나 1996년 대회 이후 2009년에 오랫만에 결승에 진출해 준우승을 거뒀던 것이 2000년대 와서 거둔 이 대회 결승 진출 기록이고, [[1996년]] 이후 20년째 우승을 못하고 있다. 국제적으로 (과거 일이긴 해도) 리틀리그 강호였으며 [[왕젠민]]이나 [[천웨이인]] 같은 메이저리거도 배출했고, 국제대회에서 나름 내세울 수 있는 성과라면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준우승[* 우승은 7전 전승을 거둔 쿠바. 결승에서 9회까지 1-11로 참패]이 있다. 그러나 국제대회에서도 리틀리그 우승은 1996년이 마지막이고 올림픽도 1992년 이후로 다시는 메달을 따지 못했다. [[아시안 게임]] 역시 [[2006 도하 아시안 게임]] 이후 금메달을 딴 적이 없다. [[아시안 게임]]만 나가면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에 밀려 매번 은메달 아니면 동메달을 땄는데 [[도하 참사(야구)|2006년 대회는 한국 국가대표팀이 심하게 삽을 푸는 바람에]] 대만이 금메달을 땄다. 그래도 실력으로는 [[대한민국]], [[일본]]과 더불어 아시아 빅3 수준에 들기는 한다. 야구가 인기종목이라 프로리그([[대만 프로야구 리그|CPBL]])도 있다. 1990년대 말과 2000년대에 야구계의 대규모 [[승부조작]]사건으로 인기가 크게 떨어졌으나 [[대만 야구 국가대표팀]]이 [[2013 WBC]]에서 사상 첫 8강에 오르며 자국 프로야구의 인기가 급속도로 회복되었다. 대만 동부 지역에는 프로야구 팀이 없어서 주로 전국구 인기를 지닌 퉁이나 중신을 응원한다. 대만 출신의 유망주들은 과거부터 긴밀한 관계를 취하고 있던 일본으로 어릴 때부터 유학을 가는 케이스가 많다. 야구가 인기종목인 데 반해 프로리그가 생긴 게 1989년으로 늦어서 그 이전 시대에는 [[일본프로야구]]에 진출해서 이름을 날린 선수들도 꽤 있었고, 2000년대 승부 조작으로 자국 리그가 크게 인기가 떨어지자 [[선수 유출]]은 과거보다도 더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다. 현재 [[닛폰햄 파이터즈]]를 거쳐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활약하고 있는 대만 대표팀의 에이스 [[양다이강]]도 청소년 시절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후쿠오카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렇게 고교/대학 시절에 유학을 나온 선수 외에도 대만에서 학업을 마치고 일본으로 떠나는 경우도 있다.[* 외국인 선수로 분류되기 때문에 야구유학을 가는 것에 비해 불리하다.] 이런 케이스의 선수로는 [[궈쥔린]], 쏭자하오, [[천관위]], [[왕이정]] 등이 있다. 이는 일본프로야구의 외국인 선수 보유제도와 관련이 있다. 일본프로야구는 외인 선수 보유가 무제한인데다가 대만 출신 선수들을 저렴한 비용에 스카우트해서 육성하는 것이 가성비 좋고 검증된 방식이다. 고교시절 유학을 떠난 선수들까지 포함하면 대만 유망주들의 유출이 심각한 편이다. 또한 일본 말고 메이저에 도전하는 선수들도 한국에 비해서 많은데 이 역시 고교/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직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부분 자국 리그에서 경험을 쌓고 가는 일본, 직행파와 자국 리그에서 경험을 쌓고 가는 파가 모두 존재하는 한국과는 달리 대만에서 자국 리그를 뛰다가 상위 리그에 도전한 자국 선수는 [[왕보룽]]이 유일하다. 국가대표팀에 대한 것은 [[대만 야구 국가대표팀]] 항목 참고. 의외로 대만 야구 팬들은 한국 야구에도 관심이 많으며 대만 프로팀과 [[아시아 시리즈]] 등의 대회에서 붙었던 [[삼성 라이온즈|팀]][[SK 와이번스|들]]은 인지도가 어느 정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대만 출신으로는 최초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서 뛰었던 [[왕웨이중]]이 2018년에 [[KBO 리그]] [[NC 다이노스]]에서 활약했을 때 [[KBO 리그]] 경기가 대만에 중계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