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방군 (문단 편집) === [[위(삼국시대)|조위 시대]] === 238년 위나라의 [[사마의]]는 공손씨 세력을 멸망시키고, 해로를 통해 낙랑군과 대방군을 접수하였다. 그때 위나라는 대방군으로 하여금 동예와(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한강 유역의 국가들을 공격하게 했다.[* 물론 이러한 강경책에 이어 삼한의 신지들에게 읍군, 읍장의 지위와 의책을 하사하는 등 유화책도 선보였다.] 위나라 역시 공손씨 세력이 이루지 못한 한반도 제종족에 대한 영향력과 교역의 확대를 이루려고 했다. 하지만 위나라는 한반도를 조위•촉한•동오간의 항쟁속에서의 우위를 점거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생각했기 때문에 크게 바뀐 것은 없었다. 왜국([[야마타이국]])의 여왕 [[히미코]] 일행이 위나라에 조공을 하러 가며 대방군을 지났다. 이 때의 대방태수 [[유하(삼국지)|유하]]는 [[나시메]]와 [[츠시고리]] 일행을 위나라의 수도까지 호송했다. 유하의 후임으로 보이는 대방태수 궁준과 교위 제준 등은 왜국에 가서 위나라의 조서와 하사품을 내리고 돌아왔다. 한편 부종사 [[오림]]은 [[진한]]의 8개국을 낙랑군 소속으로 넣으려고 했는데 통역 실수로 인해 한인(韓人)들이 격분해 [[삼한]]의 세력들이 대방군을 공격하는 [[기리영 전투]]가 일어났다. 대방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가 이들을 토벌했는데, 궁준은 전사했지만 한을 '''멸망'''시켰다.[* 과장된 표현이다. 마한이 완전히 멸망했다는 것이 아니라 소국 하나 혹은 여러 개를 멸망시켰다고 본다. 현재는 선빵을 날린 국가가 마한 북부의 소국인 [[신분활국]]이라는 설이 힘을 얻고 있다.] 이것을 백제 제8대 [[고이왕]] 13년(246년)의 기록[* 가을 8월, 위(魏)나라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이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와 삭방태수(朔方太守 : 대방태수를 잘못 기록한 듯) [[왕준]](王遵)과 함께 고구려를 쳤다. 임금이 그 틈을 타서 좌장 진충을 보내 낙랑 변경을 습격하여 백성을 잡아왔다. 유무가 소식을 듣고 분노하니, 임금이 침범당할까 두려워 백성들을 돌려보냈다. 《삼국사기》 권 24 <백제본기> 고이왕 13년]과 결부시키기도 하나, 시기가 다르고, 침략 대상이 다르다는 점에서 아닌 듯 하다. 이 시기에 “남대방군”이 [[남원시]]에 설치되었다고 일부 사서에 적혀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후술할 문단을 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