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비 (문단 편집) == 한국 == 한국사에선 사실 태후가 대비보다 훨씬 많이 쓰였다. 고려말, 조선조 이전의 대비 사용례는 손에 꼽는 정도다. 고려엔 왕대비 외에 왕태비(王太妃), 국대비(國大妃)도 있었다. 대비에 대한 한국사 최초의 기록은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은팔찌 [[유물]]에 '백제국왕대비(百濟國王大妃)'라는 칭호가 적혀 있었던 것. 그러나 이름이나 가문, 생애에 대한 다른 기록이나 단서는 없어 [[무령왕]]의 왕후일 것이라는 추측만 있다. 그 다음 기록은 [[고려]] 왕조이다. 기록을 살펴보면, [[문화왕후]]는 [[현종(고려)|현종]] 때 대비로 올려졌다. 그녀는 고려초기 왕후로 추존할 만한 왕의 모후, 조모, 외조모도 아니었으나[* 고려 초기엔 외할머니도 왕후로 추존되었는데 고려 초기 [[근친혼]] 때문에 왕이 된 이들의 외할머니가 선대의 비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즉, 모계가 공주이거나 왕족이었다.] 궁에서 성종의 조카 [[목종(고려)|목종]]과 현종을 양육했고 그녀의 딸 [[원정왕후]]가 현종의 1비가 되었으므로 자신의 양어머니나 마찬가지였기에 현종이 대비의 존호를 올린 것으로 보인다. 문화왕후 이전에 [[태조(고려)|태조 왕건]]의 6녀 [[순안왕대비]]가 있지만, 그녀는 왜 '왕대비'가 되었는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고려 초중기에는 왕의 어머니가 무조건 태후가 되었다. 죽은 경우 태후로 추존했는데 시호에서 왕후보다 높은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태후와 왕후의 중간 대우를 받은 경우가 있다. 문종 때는 생전 왕비가 아니었고 자식도 없었던 [[원목왕후]]에게도 왕후의 시호를 올렸다. 대신 능호를 만들지 않고, 절에서 제사를 그만두는 등 차등을 두었다. 이는 신하들이 또 다른 현종의 비 원순숙비[* 생전 경흥원주 - 덕비.]의 장례를 치를 때 [[문화왕후]]의 예에 의하여 장례를 치르되 그 능호는 없이 했는데, 원순숙비와 원목왕후 둘 다 선왕의 비이니 예우가 달라서는 안 된다고 건의했기 때문이다. [[인종(고려)|인종]]의 두번째 왕비로 책봉된 [[선평왕후]]의 경우, 의종 때 연수궁주 - 왕태비(延壽宮主 - 王太妃)로 책봉되었다. 이유는 생전 왕비였으나 자식이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즉, 중국 왕조의 정석적인 방법이 아닌 왕태후의 대체제로서 쓰였다. 그러니까 고려 초중기에는 애매한 위치의 비 혹은 왕비[* 왕자가 없거나 뒷배경이 없거나 등등.]가 죽으면 예우 차원에서 왕후로 올려주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런 애매한 위치에 있는 이들보다는 나으나 태후가 될 수 없는 경우에는 한단계 아래인 대비, 태비로 올렸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고려 말 원 간섭기부터 정석적인 방법으로 왕대비 제도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충렬왕]]과 [[충선왕]] 때에는 기존의 천자국식 태후, 왕후 제도를 완전히 폐지하지 못하고 태후와 대비가 섞여서 쓰였다. 이후 대비만 쓰다가 [[공민왕]] 때 반원 자주 정책으로 인해 다시 태후가 섞여서 쓰인다. 원 간섭기부터 여말까지 왕대비 또는 대비 칭호를 받은 여성은 다음과 같다. * 근비 이씨: [[창왕]]의 어머니. 창왕이 즉위하여 왕대비가 되었다가 [[쿠데타]]로 쫓겨났다. * [[정비 안씨]]: [[공양왕]] 때 왕실의 어른으로서 정숙선명경신익성유혜왕대비(貞淑宣明敬信翼成柔惠王大妃)로 올려졌다. * [[국대비 왕씨]]: 공양왕이 자신의 어머니를 자예정명익성사제혜덕삼한국대비(慈睿貞明翼聖思齊惠德三韓國大妃)로 올렸는데 이 존호를 줄여서 삼한국대비, 국대비라고 한다. [[명덕태후]]는 장남 [[충혜왕]] 때 왕대비에 준하는 대접을 받았고 차남 공민왕 때 정식으로 왕대비가 되었는데 [[신돈]] 사후에 왕태후로 격상되었고 사후 시호를 태후로 받았다. 공양왕은 [[이성계]] 등 [[권신]]의 추대로 왕위에 올라 [[왕권]]이 거의 없었다. 그러니 자신의 부모를 왕비, 국왕으로 추존하지 못하고 삼한국대비, 삼한국 [[대공]][* 대공도 한국사에서 유일하다.]으로 한단계씩 낮춰서 추존한 것이다. 국대비는 [[오대십국]] 시대에 왕의 모친을 국태부인으로 삼은 것에서 딴 것으로 보인다. 조선 왕조는 성리학적 제후국을 자처해 [[갑오개혁]] 이전까지 '왕대비' 또는 '대비'를 사용했다. 대비가 왕대비의 준말인지라 원래 둘은 동의어였다. 그러나 [[철종(조선)|철종]] 대부터는 대비가 3명이 되는 바람에 대비를 왕대비보다 한 단계 낮은 격으로 썼다. 사실 [[성종(조선)|성종]] 대에도 이랬지만 3명 모두 고부지간인 철종 대와 달리 [[소혜왕후|인수대비]]와 [[안순왕후|인혜대비]]가 동서지간이었으로 같은 왕대비지만 서열을 두는 걸로 해결했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his=문단, title=태후, version=201, paragraph=2.2.2)]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