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순진리회 (문단 편집) === 박한경의 사망과 분열 === 1995년 8월에 박한경(1917년생)은 자신의 처남이자 종무원장을 맡던 경석규(1919년생)를 두고 "경 원장은 나이도 들었으니 자유롭게 두고 들든 나든 상관하지 않겠다”라는 발언을 하는데 이게 갈등의 씨앗이었다. 이는 경 종무원장을 해임할 것인지 유임할 것인지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밝힌 것이 아니었고[* 이유종 계열은 1995년 8월을 끝으로 경석규가 해임되었다고 주장하는 근거로 이를 인용한다. 경석규 계열은 법적 대표자가 그대로라면서 이를 반박한다.] 여전히 등기상 대표는 경석규로 등재되어 있었다. 하지만 박한경의 인척인 경석규가 아닌 여주본부도장의 원장이던 이유종이 종무원장의 권한을 일부 위임 받으면서 새로운 실세로 떠오르게 되었고 박한경은 후임자를 지목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 당시 도헌에는 경석규 종무원장의 임기는 죽을때 까지로 되어 있었다. 도헌에는 박한경 도전 유고시 대표는 경석규 종무원장, 종의의장 순으로 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박한경 도전은 1996년 1월 23일 사망하면서 교단은 일부 욕심이 가득한 사람들 때문에 분열과 대립에 빠져든다. 이제부터 아래의 계통도를 살펴보면서 읽도록 하자. [[파일:external/thumb.egloos.net/a0115703_49ae587949122.jpg]] 이 도표는 2000년 초 상황을 참고로 하여 만든 것이다. 분열의 주동자라고 할 수 있는 이유종은 이후 사망하였다. 분열의 표면적 이유는 '''신위변경''' 문제였다. 대순진리회의 도장에는 영대라는 건물이 있는데 여기에는 여러 신격, 신명들을 봉안하였다. 특히 영대 4층에는 강증산을 한가운데 진영으로 봉안하였고 그 우측에는 조정산, 좌측에는 석가불을 봉안하였다. 이미 박한경이 살아있던 당시 박 모 선감이 석가불 대신 박한경 도전의 진영을 모시자고 주장하였으나 박한경은 이를 불가하다고 설명한 바 있다고 한다. 박한경 사후 천안/성주/서울 방면 등은 석가를 대신해 박한경 도전을 모셔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반면 부전/금릉/안동/포항 방면 등은 이를 반대하였다. 반대하는 측은 도전 본인이 생전에 자기 진영 모시기를 반대한 점, 박한경을 모실 경우 주문과 절을 하는 회수도 바꿔야 하는 점 등을 이유로 들었다. 분열에는 교리문제 뿐만 아니라 '''종단권력'''과 '''교단 예금 4천억원''' 문제도 있었다. 박한경 도전의 처남 경석규 종무원장과 여주본부도장 이유종 원장이 서로 갈등하여 교단 법인계좌의 대표가 경석규에서 이유종으로 불법으로 바뀌자 세무서는 교단의 사업자등록을 말소하였고, 이로 인해 계좌가 동결되었다. 이 문제는 법원으로도 갔지만 법원에서는 경석규와 이유종 둘 다 종단의 대표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유종은 종무원장의 권한을 일부 행사했지만 정식 종무원장 임명을 받은 이력이 없으며 박한경이 생전에 한 발언이 사실상 경석규 경질이라고 해석한 셈이다.[[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5/06/2011050601160.html|12년간 묶인 예금 4000억… 대순진리회의 고민]](조선일보, 2011년 5월 7일.) 두 세력은 대치를 거듭하다가 안동/금릉/경석규 세력이 여주도장을 점거하고 농성하였다. 이때 이유종 세력과 천안방면 도인들과 대치하고 경찰 15개 중대가 출동하는 등 사건이 커졌지만, 결국 부전 방면이 여주본부도장을 점거하고 이유종은 여주도장에서 쫓겨났다. 여주도장에서 밀려난 이유종과 천안방면 측이 반 년 뒤인 2000년 1월 6일, 천안방면 도인들과 폭력배를 동원하여 여주도장을 급습하여 탈환을 시도하지만 실패로 끝나 2차 사태도 종결되었다. 소위 '여주 사태'라고 불리는 이 두 번에 걸친 대규모 폭력사건과 일련의 분열을 언론사들이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대순진리회의 분열이 세간에 알려졌다. 이 여주 사태에는 대립하는 양쪽이 모두 [[조직폭력배]] 혹은 용역을 대규모로 동원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유종 여주본부 도장 원장은 중곡동 도장을 중심으로 하는 천안방면과 그 방계조직들의 수장이 되었고, 경석규 종무원장은 부전/금릉방면과 갈등을 빚고 다시 갈라져 나왔다. 따라서 1999년부터 대순진리교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아닌 각 방면들이 서로 갈등을 빚으면서 병존하는 춘추전국시대에 버금가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확실한 것은 본래 본부도장이었던 중곡동 도장을 점유하던 천안방면의 수장인 이유종의 세력이 상당히 강했고, 종무원장을 경석규는 부전, 금릉, 안동 방면의 이탈로 인해 상당히 세력이 약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유종 원장은 자체적으로 종무원장 칭호까지 썼고 반대파가 소송을 걸어서 이를 못 쓰게 막는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2011년 1월 22일 [[그것이 알고 싶다]] 786회 "2400억을 둘러싼 진실게임-어느 종교 단체의 10년 전쟁" 편에서 여주사태 등 대순진리회의 분열을 다루기도 했다. 여기선 종단의 이름은 나오지 않고 4대민족종교의 하나인 D교단으로만 나온다. 이 방송에 출연한 종단간부들은 저마다 자신이 박한경 도전의 후계자라면서 다른 간부들을 맹비난하였다.다만 방송에서 성**이라는 제보자는 D종단 원장이 여주지검에서 조사받던 중 자신을 칼로 찔렀다고 주장했으나 2013년 자해에 따른 무고죄로 2년형을 받았다. 방송 직후 재판이 종결되면 재판결과에 따라 사과방송과 다시보기 프로그램 중지를 합의하기로 함에 따라 현재는 다시보기가 되지 않는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 홈페이지에서 786회를 찾아보면 그 내용이 짤막하게 나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