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장정 (문단 편집) === 장궈타오와의 합류 === 이 무렵 사천의 장궈타오와 후난의 허룽도 근거지를 버리고 서천에 나섰다. 1934년 11월 19일 호남성 상식을 출발한 홍2방면군은 귀주로 향했는데 총지휘는 허룽, 정치위원은 임필시, 정치부 주임은 감사기였다. 휘하에는 2군단과 6군단이 있었으며 2군단장은 허룽이 겸임했고 6군단장은 소극이 군단장, 왕진이 정치위원이었다. 이들 홍2방면군은 금사강을 건너 운남으로 진입한 후 감자에서 홍4방면군과 회합했다. 이들 홍2방면군도 고생 끝에 2만에 달하던 병력이 3천명으로 줄어 있었다. 홍4방면군은 4군, 9군, 30군, 31군, 33군 5개 군, 14개 사단, 41개 연대의 병력으로 병력이 70,000~80,000명에 달했다. 마오쩌둥과 홍1방면군이 목표로 하는 것은 이 홍4방면군과의 합류였다. 홍군은 인회, 모태를 점령하여 사천성 경계로 접근했다. 국민당은 홍군은 제지하기 위해 사천군벌 [[류샹]]을 사천초비군 총사령관, 성정부주석, 보안사령관으로 임명했으며 충칭에 중앙군을 주둔시켰다. 2월 1일 군사위원회 행영을 남창에서 무창으로 옮겨 [[장쉐량]]에게 지휘를 맡겼다. 홍군은 1월 23일 귀주성 토성에서 류샹의 공격을 받아 큰 타격을 입었고 사천성 고린, 서영에서 포위망을 뚫으려 했으나 다시 실패하여 2월 28일 준의까지 철수했다. 국민당의 공습은 계속되었고 [[허쯔전]]은 몸에 17개나 파편이 박혔다. 3월 5일 장제스는 반성록에서 토벌이 순조롭게 이루어진다고 기록했다. >"주더가 되돌아와 준의와 동재가 함락되었다. 그러나 섬서성 남부에서는 [[쉬샹첸]](홍4방면군)을 격퇴해 한중은 무사하다. 사천의 남부와 북부의 공산군(홍2방면군)은 수동적인 자세가 되어 있다. 능히 대처하면 쉽게 평정할 수 있으련만' 4월 말에는 마오쩌둥의 동생 [[마오쩌탄]]이 강서성에서 유격전을 지휘하다가 정부군의 매복작전에 걸려 전사했다.사천으로의 북상을 포기한 1방면군은 귀주로 남하하였다. 3월 24일 장제스가 직접 청두, 궤이양으로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귀주군을 독려했으나 귀주군은 병사들의 아편중독과 지휘부의 무능이 심각하여 홍군을 거의 견제하지 못했고 홍군은 손쉽게 귀주군의 포위를 분쇄하고 운남으로 도주했다. 장제스는 크게 실망하여 5월 2일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주더, 마오쩌둥의 잔비를 용리와 반강에서 섬멸하지 못하고 호기를 놓쳐버린 것은 무선전보가 신중치 못해 정보가 누설되었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더욱 더 주의해 적의 교활함을 읽는다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홍군이 귀주에서 부족한 물자를 보충하기 위해 약탈을 자행하여 홍군이 떠난 귀주의 황폐함은 극에 달했고 이 때문에 장제스는 귀주의 농업세를 면제하고 성민에게 최소 반년의 휴가를 주어야 한다고 판단할 정도였다. 운남에 들어온 홍군은 세갈래로 나뉘어 진군했고 5월 9일 금사강을 도하하여 티베트로 진입했다. 티베트인들은 공산당에 매우 적대적이라 그들에게 도움을 주지 않고 오히려 공격을 가하여 티베트에서 홍군은 매우 힘들게 행군했다. 5월 말에는 폭이 300m나 되는 대도하 (다두허)에 이르렀는데 대도하는 수심이 깊고 물살이 세찬데다가 강 양안이 높은 절벽으로 되어 있어 건너기 매우 어려웠다.[* [[https://blog.naver.com/worldphoto/220554585575|대도하의 현재 모습]], 지금은 공산당의 성지처럼 되었다] 그리고 70년 전 [[태평천국]]의 생존자들이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한 적이 있었다. 태평천국의 일파를 이끌던 [[석달개]]가 사천 지역을 장악하려다 실패하고 이 대도하 유역에서 몰살당했다. 한 정치위원은 그곳을 이렇게 묘사했다. >"오솔길은 산을 따라 구절양장으로 꾸불꾸불하게 뻗어 있고, 산은 마치 곧게 뻗은 칼이 구름을 조개듯 수직으로 날카롭게 솟아나 있었다. 오른쪽 몇백미터 아래로는 물살이 거센 강에 하얀 물보라가 용솟음쳤다. 단 한 걸음이라도 잘못 디디면 끝장이었다. [[파일:루딩 교.jpg]] [[파일:루딩교.jpg]] 현재의 루딩교 모습. 홍색 관광의 거점 중 하나이다. 인근에 노정교(瀘定橋, 루딩교)라는 다리가 있어서 그 다리를 건너기로 했는데 노정교는 18세기에 만들어진 길이 100m의 현수교였다.[* 영문 위키백과 참조.] 하지만 홍군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국민당이 다리를 끊고 뼈대인 쇠사슬만 남아 있었다. 5월 29일, 22명의 홍군 특공대가 목숨을 걸고 나무판을 놓으려 하자 국민당은 폭격과 기총소사로 이를 저지하려 했으나 특공대가 수류탄을 던져 강 건너편을 제압하고 2시간 만에 다리를 보수, 홍군은 대도하를 도하할 수 있었다. 이 노정교 도하는 대장정 때의 전투 중에서도 특히 드라마틱하고 유명한 전투여서, 대장정을 다룬 다큐멘터리나 영화 등에서 반드시 언급한다. 이후 홍군은 협금산을 넘어 추위와 고산병과 싸워야 했다. 행군길마다 병사들의 시체가 줄을 이었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동상과 발진 티푸스로 고생했다. 이런 개고생을 거쳐 6월 6일 사천에 겨우 도달할 수 있었는데 살아남은 홍군은 10,000~20,000명에 불과했다. 이때의 재밌는 일화로 홍군이 [[마오타이#s-1]]라는 마을에 들렀는데 백여개의 항아리에 가득 찬 액체를 보고 물인 줄 안 홍군이 그 물로 발을 씻다가 그것이 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로 [[마오타이#s-2|마오타이주]]였다. 술을 좋아하던 오토 브라운이 발을 씻지 않은 술을 한모금 마시더니 곧바로 취해버렸고 이에 홍군은 너도나도 마오타이주를 한모금씩 마셨다. 홍군의 마지막 대열이 마실 차례에는 발을 씻은 더러운 술만 남았지만 홍군은 이도 모두 마셔버렸다. 이것이 마오타이주가 유명해진 계기다. 6월 중순, 의복과 신발도 제대로 갖추지 못해 스스로를 거지군으로 자조하던 홍1방면군 선발대가 사천성 마오궁(무공)에서 인근의 무오에 주둔하다가 홍군이 접근한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홍4방면군과 조우했다. 6월 25일 마오쩌둥과 장궈타오가 만나 서로를 얼싸 안았고 합류를 축하하는 연회가 열렸다. 흥분한 마오쩌둥은 혁명가라면 고추를 많이 먹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강소성 출신이라 매운 것을 먹지 못하는 보구가 반박하는 등 연회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편하게 유쾌했다. 하지만 대장정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