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장정 (문단 편집) === 홍군 분열 === 한편 국민정부는 5월 26일 초비사령부를 사천 청두로 옮겨 공산당 추격을 독려했고 7월 중순, 추격대의 중대장 이상 간부들을 불러모아 분발을 촉구하며 그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제군은 서강에서부터 적비추초를 출발한 이래 호남, 귀주, 운남의 여러 성을 거쳐 현재의 사천에 도달했다. 반전을 거듭하며 종횡으로 전장을 누벼 5천 킬로미터의 여정을 주파, 온갖 고난과 난관을 헤치며 이룩한 대장정은 중국의 유사 이래 처음이다. >우리 측의 선전으로 공산군은 현재 5,6천 명 정도가 남아있을 뿐이며 이는 강서를 출발할 때의 거의 십분의 일의 전력에 지나지 않는다. 제군은 더위에 굴하지 않고 금사강을 건넜으며 추위를 두려워하지 않고 대도하를 넘었다. 그런 연유로 지금과 같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 >중앙군의 적비토벌의 의의 및 경과의 성적, 1935년 7월. 이 시각 홍군은 첫 회합의 화기애애함은 사라지고 노선 충돌로 다시 분열의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바로 양하구에서 제1차 정치국회의가 소집되었는데 정치국위원들과 더불어 중앙위원 천창하오, 후보중앙위원 쉬샹첸 등도 참여했다. 천창하오는 "쭌이 회의에서의 중앙개조는 비합법적이다."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섬서성으로 북상해 류즈단(유지단)의 부대와 합류하자는 마오쩌둥의 주장에도 반박하여 장궈타오는 남하하여 사천, 티베트의 변경에 근거지를 구축하여 사천성을 탈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홍1방면군은 1만에 불과한데 반면 진용을 갖춘 홍4방면군은 그 일고여덟배에 달했으니 장궈타오의 목소리는 당연히 더욱 컸다. 장궈타오는 급기야 당 노선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했고 천창하오는 장궈타오에게 당 총서기 자리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7월에 이르자 홍1방면군과 홍4방면군의 무력충돌이 벌어졌고 세력이 압도적으로 약했던 마오쩌둥이 물러섰다. 뤄푸는 장궈타오에게 당 총서기 자리를 주겠다고 달랬으나 장궈타오는 더 실질적인 권력을 가질 수 있는 직위인 연합 홍군 총정치위원 자리를 요구했다. 이 때문에 저우언라이는 홍군 총정치위원에서 물러났고 마오쩌둥도 전적사령관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주더가 가진 중앙혁명군사위원회 주석 자리도 장궈타오의 수하들이 주더에게 물러날 것을 요구하는 바람에 위험했으나 장궈타오는 주더가 유임하도록 허락했다. 하지만 중앙혁명군사위원회도 사실상 장궈타오의 손에 들어왔다. 한편 이미 홍군의 약탈로 근처의 식량이 고갈되고 현지인들의 저항이 격렬해지면서 홍군은 다시 대장정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장궈타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단 목적지는 사천, 감숙, 섬서의 경계지역이었다. 홍군은 이동하면서 가축과 곡식을 징발했으나 주민들이 무기를 들고 저항하고 홍군을 습격하자 징발조를 더 보내기도 어려워졌다. 열악한 상황 속에서 7월 20일, 행군이 잠시 멈추고 홍군 정치국 회의가 소집되었다. 뤄푸는 장궈타오에게 악예환 소비에트에서의 성과를 보고해달라고 요청했다. 장궈타오가 보고하자 마오쩌둥이 장궈타오가 심각한 과오를 범했다고 질책했다. 장궈타오는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8월 5일 모아개 회의에서 마오쩌둥은 북상노선을 주장했다. 류즈단의 부대와 합류한 후 몽골과 소련에서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장궈타오는 다시 사천군의 방어선을 뚫고 성도평원을 취하자고 주장했다. 뤄푸가 다시 장궈타오가 악예환 소비에트를 잃은 일로 비난하자 장궈타오는 화를 내며 "전체 중앙 소비에트 지구를 잃은 것은 당신들 아니오. 어째서 당신들 노선이 옳단 말이오?"라고 외쳤다. 하지만 이날 회의에서 뤄푸와 마오쩌둥은 장궈타오의 제안을 거부했고 장궈타오는 일단 정치적 반박은 삼가고 감숙 남부로 전진할 것을 제안했다. 바로 앞에 놓인 슾지대를 따라 양갈래로 갈라져 감숙성에서 합류하기로 결정함으로 8월 10일 장궈타오와 주더의 좌로군[* 1방면군 소속 5,9군단, 4방면군 소속 9,31,33군.]이 선발로 떠나고 8월 23일 우로군[* 1방면군 소속 1,3군단, 4방면군 소속 4,30군.]이 행군을 시작했다. 마오쩌둥과 대다수 정치국 위원들은 우로군에 속해 있었는데 저우언라이가 말라리아에 걸려 아팠기 때문이었다. 저우언라이의 병이 호전된 것이 8월 말이었고 우로군은 그때 행군을 재개했다. 우로군은 넓고 아름다운 평원에 도착했는데 이 평원은 겉보기는 아름다웠으나 살얼음 낀 대초지가 가득 펼쳐져 전진하기에 최악의 환경이었다. 굶주림과 질병이 홍군을 덮쳤고 쥐를 잡아먹고 대변에서 낱알을 골라내는 6일 동안의 고생 끝에 겨우 습지를 나올 수 있었다. 이 습지를 통과하는 데만 500명의 병사들이 사망했다. 그 순간 국민당 49사단이 홍군을 덮쳤는데 선두에 선 우로군과 충돌, 이틀에 걸쳐 격전을 벌였다. 홍군은 5,000명이나 되는 사상자를 냈고 장궈타오는 자신의 병력이 큰 손실을 입었다는 사실에 격노하여[* 국민당 49사단과 충돌했다는 부분은 장개석비록에만 보이니 일단 주의해서 읽을 대목이다.] 이대로 북상하면 전군이 궤멸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장궈타오, 주더, 류보청의 명의로 남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9월 8일 저우언라이, 뤄푸, 마오쩌둥 등 정치국원과 사령관, 지도부들이 연명하여 장궈타오에게 명령에 따를 수 없다는 전보를 보냈다. >"형들께서 심사숙고하시어 아바와 줘커지에서 양식을 보충한 뒤에 방향을 바꾸어 북진할 것을 즉각 결정해 주시기를 바라 마지 않습니다." 그 이전에 장궈타오는 우로군에 속한 자신의 부하들에게 비밀전보를 보내 정치국에 대한 투쟁을 착수할 것을 지시했는데 마오쩌둥에게 들키고 말았다. 마오쩌둥은 즉각 긴급상무위원회를 소집, 마오쩌둥, 뤄푸, 저우언라이, 보구, 왕자샹 등이 중앙위원회 명의로 <북상 방침을 집행하기 위해 동지들에게 고하는 글>을 발표하여 전 홍군에게 남하하지 말고 '중앙위원회의 전략 방침을 굳게 옹호하며 신속하게 북상하여 섬서, 감숙, 사천에 새로운 소비에트 지구를 건설'할 것을 촉구했다. 장궈타오는 양보하지 않고 분통을 터트리며 독자적으로 남하했다.[* 장개석비록에 따르면, 마오쩌둥은 장궈타오에게 감숙의 기병과 비행기가 무서운 모양이라고 비난했고 장궈타오는 마오쩌둥에게 소련으로 도망쳐 편히 살려고 한다고 비난했다. 장궈타오는 병사들에게 감숙까진 21일이 더 걸릴 것이라면서 중국혁명의 계속을 바라고 대초원에서 21일이나 진군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자는 자신에게 따르라고 외쳤다고 한다.][* 세부적인 사항 외에도 전체적으로 기록이 엇갈리는 부분으로 이시카와 요시히로의 중국현대사 3권, 장개석비록, 모택동 vs 장개석에서는 마오쩌둥이 비밀리에 일방적으로 먼저 병력을 빼서 북상한 것이라고 하는 반면, 알렉산드르 판초프의 마오쩌둥 평전은 장궈타오가 선수를 친 것으로 설명한다.] 9월 중순, 감숙성 뎨부현 어제에서 열린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홍1군, 3군, 군사위원회 종대를 중국공농홍군섬감지대로 재편성하고 펑더화이를 사령관, 린뱌오를 부사령관, 마오쩌둥을 정치위원으로 임명했다.[* 1종대 사령관 린뱌오, 2종대 사령관 펑더화이, 중앙군사위원회 종대 사령관 섭검영.] 왕자샹은 정치부 주임, 양상쿤은 정치부 부주임이 되었다. 마오쩌둥은 감숙 동북이 아니라 아예 소련 접경지대까지 전진할 것을 제시했다. >"장궈타오가 남쪽으로 감으로써 중국 혁명에 막대한 손실을 야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절대로 낙담하지 말고 전진해야 한다. 섬서 북부와 감숙 서북부가 우리가 가야 할 곳이다." 마오쩌둥은 전혀 연락이 닿지 않던 모스크바와 연락하기 위해 동생 마오쩌민을 비롯한 2명의 특사를 신강성을 통해 파견하려 했다. 그 순간 섬서 서북쪽에서 류즈단이 작전 중이라는 소식이 들렸다. 아이러니하게도 노획한 국민당 신문에서 이 소식을 접한 마오쩌둥은 대장정이 항일을 위한 행군인 것처럼 선전하자고 제안했고 9월 22일 간부회의에서 "민족의 위기가 날로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반드시 계속 북쪽으로 행군하여 일본과 대항한다는 원래 계획을 완성해야 한다. 우선 우리는 류즈단의 홍군이 작전 중인 섬서 북쪽으로 갈 것이다."라고 발언했다. 10월 중순, 홍군 제1지대가 섬서 북쪽 접경지대를 돌파해 우치진에 다다랐다. 선발대는 80킬로미터 떨어진 류즈단의 사령부로 달려갔고 10월 22일 마오쩌둥은 우치진에서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회의를 소집, 대장정이 끝났음을 선포했다. 장궈타오와 결렬해 다시 북으로 향한 6천 명의 홍군 중에서 살아남은 장병은 5천에도 미치지 않았으나 그들은 살아남았다. 11월 1일 국민정부는 섬서성의 성도 서안에 서북초비 총사령부를 두어 장쉐량을 총사령관인 장제스의 전권대리로 임명했다. 이것이 [[서안 사건]]으로 이어졌음은 주지의 사실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