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장정 (문단 편집) === 장궈타오의 운명 === 한편 모아개로 돌아온 [[장궈타오]]는 9월 중순 6만의 병력을 이끌고 남하하였다. 이들은 10월 작목조에 이르러 새로운 중국공산당 중앙을 선포하고 장궈타오, 주더, 진창호, 류보청 등 15명의 중앙위원을 추대했으며 장궈타오가 총서기로 선출되었다. 두개의 당중앙이 등장하여 홍군이 분열되는 것을 우려한 코민테른은 코민테른 요원 장호를 파견하여 다음과 같은 타협안을 제안했다. 1. 북방과 남방의 2개 당중앙을 동시에 철폐하고 중앙의 직권행사를 중지한다. 1. 북방 중앙을 서북국으로 개편하고 남방 중앙을 서남국으로 개편하며, 지구와 관할부대를 경계로 각각 직권을 행사한다. 1. 서남국은 홍2방면군의 주요책임동지를 포함한다. 1. 각 방면군은 서로 협조하면서 서북으로 발전해 나가는데, 현재는 영하와 감숙을 발전방향으로 정한다. 1. 과거의 마찰과 불화는 통일전선의 새로운 정책을 공동으로 집행한다는 전제 하에 모두 불식시키고 단결을 모색한다. 장궈타오는 이 타협안을 수용하여 6월 당중앙을 취소했다. 장궈타오의 홍4방면군은 티베트와 사천을 헤매며 "천전, 노산까지 가면 쌀밥을 배불리 먹을 수 있다."라고 선전하며 성도평야로 진출하려 했다. 하지만 수만에 달하던 장궈타오 부대는 2차 양광사변으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던 국민정부가 파견한 쉐에가 지휘하는 토벌군에게 박살났다. 산악지대로 달아난 장궈타오는 티베트의 감시로 달아나 소비에트구를 선포하였으나 대세가 완전히 기울어졌다고 판단한 류보청 등이 감숙으로 북상하자고 주장하여 8월 16일 감숙, 영하를 돌아 섬서로 향했다. 2방면군도 4방면군과 합류하여[* 시기는 기록마다 다른데 장개석비록은 6월 합류설을, 모택동 vs 장개석은 10월 하순경 합류설을 기술하고 있다.] 10월 1,2,4방면군의 주력이 드디어 후이닝에서 합류했다. 11월 장궈타오는 주더를 대동하고 결별 이후 처음 마오쩌둥을 만나 원군을 요청했으나 마오쩌둥은 이미 힘을 잃은 그를 환대하면서도 원군 요청은 거절했고 장궈타오는 정원에서 마부팡 군벌부대에게 패배하여 완전히 파멸했고 12월 꼬리를 내리고 연안으로 들어가 마오쩌둥과 합류했다. 그곳에서 중앙혁명군사위원회 부주석 겸 총정치위원이 되었으나 이미 그는 끝장난 후였다. 1938년 그는 공산당을 탈당, 국민당에 합류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